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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칼럼] 두려움의 사회와 민주정치의 위기

중앙일보 2020.05.20 00:54 종합 31면 지면보기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지난해 토론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 공항 서점에 들렀다. 대부분 공항서점에는 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통속소설이나 추리소설, 경영 관련 책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한 구석에 어울리지 않게 놓여 있던 정치철학 신간, 『The Monarchy of Fear』가 눈에 들어왔다. “한 철학자가 본 우리 시대의 정치위기”라고 부제가 달린 이 책을 비행기 안에서 흥미롭게 읽었다.
 

두려움 악용하는 포퓰리즘 정치
뉴딜·파시즘·나치즘을 돌아봐야
뉴노멀 불안감과 민주정치 위기
포퓰리즘 국가주의는 견제해야

책의 저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 교수는 시카고대 철학과와 로스쿨에서 정치, 교육, 법에 관한 철학 강의를 한다. 『두려움의 군주제』는 누스바움 교수가 마침 교토에서 저작상을 수상받기 위해 일본에 있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쓰기 시작했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감성적이고 공격적인 트럼프가 미국 유권자들에게 어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누스바움 교수는 이를 미국 사회에 만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두려움이 커지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분노, 시기, 증오의 감정이 커지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희생양, 마녀사냥의 현상이 나타나고 집단 갈등이 증폭된다. 이렇게 되면 가짜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무조건 추종하는 사람들의 집단화가 심화되는 사회병리 현상이 나타난다.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로 유명한 밥 우드워드의 저서 『공포 : 백악관의 트럼프』 도 두려움이 주제다. 그는 선거과정에서 인터뷰한 트럼프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진짜 힘은 두려움이다.” 트럼프의 선거 전략은 미국 중하층 백인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한 것이다. 집권 후 재선을 노리는 지금도 이 전략은 유효하다. 미국제일주의(America First)를 구호로 내세운 보호무역, 반이민정책, 우방국에 대한 군비요구 등 거칠고 강력한 포퓰리즘 정책의 기반이 바로 대중의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이용하는 정치는 미국만이 아니다. 좌파건 우파건 두려움은 배타적 국수주의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포퓰리즘의 등장을 부추긴다. 평화헌법 개헌을 추진하는 일본의 아베. 2050년 세계 최강국 중국몽을 꿈꾸는 시진핑. 개헌을 통해 2036년까지 집권을 노리는 러시아의 뉴 차르 푸틴. 이들 모두 불안정한 국제질서 속에서 두려움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강력한 리더십의 포퓰리즘 정치를 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 인류 문명은 급격한 변화에 직면한다. 20세기 초에도 에너지와 대량생산 체제의 혁신으로 대량 실업사태와 극심한 빈부 격차가 나타났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전 세계 5천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1918년 스페인 독감, 1929년 세계 대공황. 불안감과 위기감이 고조된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21세기 초 오늘 그 두려움의 기시감이 밀려온다.
 
두려움에 떠는 국민들은 쉽게 국가주의 유혹에 빠진다. 1930년대 시작된 뉴딜, 파시즘, 나치즘은 두려움의 사회에 대한 국가주의 해결 방안이었다. 볼프강 쉬벨부쉬는 『뉴딜, 세 편의 드라마』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테네시강 유역개발사업,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아그로 폰티노 대형 간척사업, 독일 히틀러의 아우토반 고속도로 사업을 분석했다. 세 편의 닮은 꼴 뉴딜정책 드라마는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이기고 밝은 미래를 꿈꾸게 해주었다. 하지만 뉴딜이 포퓰리즘과 연결될 때 심각한 민주정치의 위기가 나타났다. 이후에 전개된 파시즘과 나치즘의 국가주의가 바로 극단적 사례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매주 라디오 방송을 이용한 노변정담을 통해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고 서민층에 다가가는 감성전략으로 뉴딜을 끌고 나갔다. 두려움의 사회에서 국가 역할을 강조한 결과 소수정당에 불구했던 민주당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네 번 연임뿐 아니라 아이젠하워 시기를 제외한 삼십년 넘는 장기집권을 이어나갔다.
 
21세기 초 IT혁명과 AI로 대량실업과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청년실업과 조기퇴직이 만연하고 노년층도 수명연장을 축복이 아니라 두려움의 미래로 여긴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미래를 더 큰 두려움으로 몰고 간다. 소상공인부터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연결고리가 언제 붕괴되어 내 삶을 파괴시킬까 두렵다. 비대면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험은 당연하게 여기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입증해 주었다.
 
코로나 사태로 21세기 인류문명 패러다임의 대전환은 곧 닥칠 미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인 뉴 노멀은 필연인 반면 두려움의 대상이다. 두려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사회에서 국가의 보호막은 가뭄의 단비와 같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모든 일에 국가가 나서는 포퓰리즘 국가주의의 유혹은 경계해야 한다. 국가주의 처방은 위기 극복에는 효율적이지만 일상화되어 이데올로기화하면 민주정치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그늘을 악용하는 포퓰리즘 국가주의 유혹을 견제하기 위한 지식인과 전문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오늘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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