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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신선놀음 깊은 맛 아쉬운 ‘10초 바둑’

중앙일보 2020.05.20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인터넷 바둑은 ‘10초 1회’가 대세다. 한 수 둘 때 10초의 시간을 주고 단 한 번만 넘겨도 패배한다는 숨 가쁜 조건이다. 수많은 프로기사와 아마 고수, 프로지망생들이 거의 모두 이같은 10초 1회의 초속기로 대국한다. 생각 시간 10초는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장고파 조치훈도 초속기 대국
디지털 시대 감각적 승부가 대세

이 찰나의 시간에 싸울 것이냐, 물러설 것이냐를 결정한다. 공격과 수비, 실리와 세력, 전략의 강온을 결정하고 곧장 행동에 돌입한다. 생각보다는 감각, 감각보다는 무의식, 무의식보다는 행동이 앞선다. 바둑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바둑 하면 떠오르는 게 ‘신선놀음’이었다. 나무꾼이 산에 들어갔다가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넋 놓고 구경했다. 해가 저물어 일어서니 들고 있던 도끼자루가 썩어있었고 동네에 가보니 어느덧 200년이 흘렀더라는 그 얘기. 난가(爛柯:썩은 도끼자루)가 바둑의 별칭이 된 사연이다. 이로부터 바둑은 줄곧 시간의 적이었고 시간을 잡아먹는 대명사로 꼽혔다. 하지만 오늘날은 바둑 하면 ‘초읽기’가 떠오른다. 초읽기에 능한 것, 시간 연장책을 잘 사용하는 것도 바둑 기술의 일부가 됐다.
 
TV가 변화를 이끌었다. TV 중계를 위해 거의 모든 바둑대회가 차례로 속기로 변했다. 제한시간 5시간의 전통적인 신문 기전은 사라지고 10분+초읽기, 5분+초읽기, 1시간+초읽기 등 다양한 방식이 동원되었다. 삼성화재배, LG배 등 세계대회는 2~3시간을 유지했다. 오늘날 일본의 8시간짜리 이틀 바둑을 제외하면 이들 세계대회가 가장 긴 장고 바둑이 됐다.
 
조치훈 9단은 ‘시간’과 가장 밀접한 기사다. 그는 소문난 장고파여서 8시간짜리 바둑에서도 100수 언저리면 초읽기에 몰리곤 했다. 신기한 것은 초읽기에 몰려도 나머지 200수 정도를 계속 잘 둔다는 것이다. 한 수에 3시간 넘게 장고한 기록도 많지만 TV 속기대회서도 곧잘 우승했다. 그런 조치훈이 한국 대회서는 시간패를 많이 당했다. 초시계를 누르는데 서툴러서였다.
 
조치훈은 유창혁 9단과의 결승전에서 머리의 땀이 판에 쏟아지는 바람에 이를 손수건으로 닦다가 시간패를 당한 일도 있다. 그런 조치훈도 인터넷에서 10초 바둑을 둔다.
 
프로기사들은 왜 10초 바둑을 좋아할까. 박영훈 9단은 “수읽기 연습에 좋다. 1, 2초 안에 노타임으로 두면서 감각을 익힌다. 승부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고 재미도 있다.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다”고 말한다.
 
김지석 9단처럼 인터넷 바둑을 두지 않는 기사도 있다. “집중이 안 돼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김지석도 연구실 훈련에선 10초 바둑을 자주 둔다. “10초 바둑은 위험하다”는 비난 목소리도 있다. 감각적이고 무리한 국면 운영이 몸에 배 습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속기 때문에 한국이 중국에 밀린다는 항의도 있다. 중국리그는 1~2시간이 주류여서 세계대회에 대비하는 데 비해 한국리그는 너무 속기 일변도라는 비판이다. 옛날 바둑에 대한 향수는 가끔 속기 혐오로 나타난다. 결국 한국리그도 2시간, 1시간, 10분의 3종류 대국으로 바꿨다.
 
김지석 9단은 “한국이 밀리는 건 속기 탓이 아니다”고 선을 긋는다. “한국 1위 신진서 9단, 중국 1위 커제 9단이 다 속기파다. 성적 좋은 기사 중 장고파는 드물다.”
 
사실 강자들은 속기든 장고 바둑이든 다 잘 둔다. 10초 바둑에서도 최강인 박정환 9단과 신진서 9단은 LG배 결승을 앞두고 “3시간짜리니까 진짜 승부를 해볼 수 있게 됐다”고 의미 있는 멘트를 던진 적이 있다.
 
비디오와 디지털 시대에 속기는 필연의 흐름이다. 그러나 속기는 바둑의 깊은 맛을 사라지게 한다. 승부가 몽땅 운처럼 보인다. 이걸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가 바둑의 과제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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