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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중앙일보 논설위원,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화가 치밀어서"…이천 화재사고 야전사령관 박두용의 한탄

중앙일보 2020.05.19 00:39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황금연휴를 앞둔 지난달 29일이었다. 경기도 이천시 물류창고에서 불이 났다. 근로자 38명이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숨졌다. 2018년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47명 사망) 이후 청와대 정책실장을 단장으로 한 대책팀에서 특별대책을 내놓은 지 2년여 만의 대형 참사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천 화재에 대해 “후진적이고 부끄러운 사고”라고 개탄했다.
 

12년 전 냉동창고 화재와 판박이
서류 규제만 잔뜩, 전문성은 뒷전
안전을 협상 대상 삼는 건 후진적
사고 잦은 업체, 발주 때 걸러내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박두용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화재 소식에 “몸이 떨렸다”고 했다. 죄책감과 미안함, 바뀌지 않는 안전의식과 제도가 못내 한탄스러워서다. 그가 화재사고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2008년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의 불길이 거의 잡힌 뒤 앙상한 잔해가 드러나고 있다. 이날 밤늦게까지 실종자 수색 작업이 벌어졌으나 40명 모두 숨진 채로 발견됐다. 중앙포토

2008년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의 불길이 거의 잡힌 뒤 앙상한 잔해가 드러나고 있다. 이날 밤늦게까지 실종자 수색 작업이 벌어졌으나 40명 모두 숨진 채로 발견됐다. 중앙포토

지난달 29일 오후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불이 나 소방관들이 진화작업 및 인명 수색을 하고 있다. 2008년 사고의 판박이다.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오후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불이 나 소방관들이 진화작업 및 인명 수색을 하고 있다. 2008년 사고의 판박이다. 연합뉴스

 
박 이사장이 이천 물류센터 화재에 이토록 분노하고 낙담하는 이유는 12년 전인 2008년 사고와 판박이여서다. 이천 냉동창고에 불이 나 40명이 숨졌다. 그는 이 사고도 다뤘다. 같은 사고를 두 번 겪은 셈이다.
 
박 이사장은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원장이었다. 화재 원인을 못 찾던 경찰과 소방당국을 대신해 유증기에 불꽃이 튀어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박 이사장은 “이번에도 (원인이) 똑같다”며 “국격은 올랐는데, 달라진 게 없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2008년과 달리 그는 지금 야전사령관이다. 화재사고 수습, 원인 조사, 희생자 유족 지원, 대책 마련 등을 진두지휘 중이다. 그가 현장에서 느끼고 생각한 정책의 개선 방향을 들었다.
 
박두용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관리 조직을 전문성 위주로 승격·개편해 예방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박두용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관리 조직을 전문성 위주로 승격·개편해 예방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사고 발생 전에 여러 차례 문제를 지적했는데, 정작 그 문제로 사고가 났다. (산업안전공단은 서류심사 두 차례, 현장 확인 4차례에 걸쳐 시정조치를 내렸다.)
"안전공단의 권한이 미약하다. 심각한 문제라고 여길 때는 작업중지나 즉각 조치할 권한의 위임이 필요한데, (그 권한은)고용노동부에 있다. 별수 없이 고용부에 의뢰해서 작업중지 조치도 내려졌지만…."
 
산업안전법에 따라 유해위험방지계획서 등을 시공사로부터 받아 공사 전에 심사하고 확인하지 않는가.
“서류로는 안 된다. 현장 작동성을 강화해야 한다. 안전을 강화한다면서 서류 중심의 조치만 잔뜩 늘렸다. 서류를 현장에 붙여(현장 비치) 놓으면 뭐하는가. 벽에 붙인다고 실효성이 있는가. 오히려 서류를 줄이는 규제 합리화가 시급하다. 대신 현장 작동성을 높여야 한다.”
 
어떻게 해야 현장 관리에 도움이 되나.
“노동부 감독, 공단의 감독, 민간기관 컨설팅, 자가 규제의 4박자가 원활하게 돌아가야 한다. 노동부 감독은 처벌이 목적이다. 따라서 불가피한 경우에 작동하는 게 맞다. 공단의 예방과 개선 작업이 우선되고, 강화돼야 한다. 여기에 민간 기관의 기술지도와 사업주와 노조의 셀프 안전관리가 더해지는 체제가 필요하다. 특히 노조나 직장협의회 같은 노동 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들은 현장에 상주한다. 안전문제에 관한 한 노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노조의 자율 안전활동 강화와 그에 따른 책임 분담이 필요하다. 사고가 난 뒤에야 노조가 나서는 이상한 풍경이 반복된다.”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법정 형량은 세계에서 높은 국가군에 속한다. 법원에서 낮게 판결한다. 한데 처벌을 강화한다고 산업안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전문성을 높여 예방 안전으로 가야 한다. 처벌은 사후규제다. 처벌만 강화하는 건 사후약방문으로 사고를 막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 제도나 행정체계에도 전문성이 없다.”
 
노사가 합의해서 법이나 제도를 바꿔오지 않았는가.
“산업안전은 노사정 협의나 합의 대상이 아니다. 전문 영역이다. 안전은 ‘절대’의 문제다. 안전을 다른 문제를 풀기 위한 카드로 쓰면 안 된다.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일을 두고 협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후진적이다.”
 
안전공단이야말로 전문기구 아닌가.
“현장에서 즉각 시정해야 할 사안을 적발해도 시정 권한이 없다. 질병관리본부를 청(廳)으로 승격한다고 하는데, 그건 전문 영역이어서이고, 그걸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산업안전도 청으로의 승격이 필요하다. 최소한 관리본부 체제는 돼야 한다. 고용부의 직제도 지금처럼 일개 국(局)으로 놔둘 일이 아니다. 전문성을 갖춘 실장이나 담당 차관이 배치돼 전권을 가지고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 (고용부의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은 노사관계를 주로 다루는 노동정책실장, 1급, 산하에 편재돼 있다.)”
 
이번에 사고를 낸 ㈜건우는 안전사고가 많은 회사였다, 문제가 있는 시공업체를 시장에서 퇴출하는 방안은 없겠는가.
“아주 중요하다. 발주자는 설계를 한다. 설계단계에선 건물 붕괴 같은 건축 안전만 다룬다. 건설 안전은 없다. 입찰 전에 시공단계 의무 안전수칙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시장기능을 활용한 안전 대책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발주 업체가 시공사 후보를 추려 안전공단에 이들 업체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면, 공단이 해당 업체들의 안전사고 이력 정보를 제공하는 식이다. 발주업체는 이를 바탕으로 시공사를 선정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안전을 도외시한 업체가 시장에 발을 못 붙인다. (㈜건우는 지난해에만 7건의 대형 안전사고를 냈다. 원주기업도시 공장 신축 현장에서 근로자 5명이 다쳤고, 용인에선 교회 증축 공사 도중 근로자가 추락했다. 이런 정보가 공사 발주단계에서 발주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체계만 갖춰도 사고가 잦은 회사는 시공사로 선택을 못 받게 돼 자연스레 퇴출 수순을 밟게 된다는 게 박 이사장의 생각이다. 시장 기능을 통한 자율 정화조치인 셈이다.)”
 
박 이사장은 인터뷰를 마친 뒤 서둘러 이천 사고 현장으로 내려갔다. 그는 "거대한 불행 앞에서도 많은 분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다. 그걸 보며 희망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엔 여전히 허탈과 분노, 자괴감이 드리웠다.
 
◆박두용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산업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3M 안전환경연구소 선임연구원, 한성대 안전보건경영대학원장, 산업안전보건연구원장을 역임했다. 국제무대에서도 활약했다. 싱가포르 정부 산업안전보건국 국제자문단 위원, 세계 산업위생학회(IOHA) 회장, 아시아태평양안전기관협의회(APSS) 사무총장, 아시아 산업위생전문가네트워크(ANOH) 회장직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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