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망한다" 들으면 더 커졌다…韓서 '아궁이' 없앤 한샘 50년

중앙일보 2020.05.16 09:00
1970년대 재래식 부엌.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하는 아궁이와 부뚜막, 간단한 그릇장이 보인다. 사진 한샘

1970년대 재래식 부엌.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하는 아궁이와 부뚜막, 간단한 그릇장이 보인다. 사진 한샘

#난방·취사 겸용 아궁이가 안방과 바로 연결돼 있다. 부뚜막은 너무 낮아 쪼그리고 앉아야 간신히 음식을 할 수 있다. 연탄불 혹은 석유풍로를 동원해 하루종일 세끼를 만들었다. 음식을 만드는 동시에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봉당까지 겸했다. 밥상이나 설거지통을 들고 하루에 수십번 들락거리는 구조다. 가사는 중노동이었다.  

[한국의 장수 브랜드] 39. 한샘

 
50년 전인 1970년대 초 전형적인 한국의 부엌의 모습이다. 입식 부엌은 아파트가 새로운 주택 형태로 등장하면서 보급됐다. 불을 지피는 아궁이가 사라지고 난방에 보일러가 쓰이면서 부엌은 처음으로 요리만 하는 공간으로 독립했다. ‘싱크대(스테인리스 스틸 개수대와 상판)’가 처음 소개되고 혁명은 빠르게 진행됐다. 
 

한국 부엌 바꾼 한샘, 50년 됐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로 일하던 한샘 조창걸 명예회장은 입식 부엌의 시대가 왔음을 바로 포착했다. 아궁이와 부뚜막을 싱크대로 바꾸면 가사노동은 한결 효율적이 된다. 한국에선 60년대 후반 들어 수입품이던 싱크대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시멘트에 타일을 붙여 만들었던 재래식 개수대와 조리대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개수대와 상판으로 빠르게 대체됐다. 
 
조 명예회장은 주택설계와 시공감리를 하면서 부엌가구 제작을 믿고 맡길 회사가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싱크 제조사도 소수였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부엌가구 시장 가능성은 무한한데, 가능성 있는 업체가 보이지 않았다. 
 
조 명예회장은 자본금 200만원을 들고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7평(23㎡) 규모 매장 겸 사무실을 냈다. 인근 불광동에 군용천막과 비닐하우스로 공장(330㎡)도 마련했다. 그리고 ‘끝없이 용솟음치는 맑은 샘’이라는 순우리말을 찾아 이름도 지었다. 한샘의 시작이었다.    
1970년 한샘 조창걸 명예회장이 자본금 200만원으로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낸 매장 겸 사무실. 사진 한샘

1970년 한샘 조창걸 명예회장이 자본금 200만원으로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낸 매장 겸 사무실. 사진 한샘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주택 건설 호황기로 일감은 쏟아졌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확대되면서 변화는 급물살을 탔다. 한샘이 사업을 시작했던 불광동은 지금의 신도시와 같은 신흥주택단지로 신축과 개축 붐이 일던 곳이다. 한샘은 직접 부엌 도면을 그려 보여주며 영업을 했다. 신흥주택단지인 불광동 일대에서 입소문은 금세 퍼졌다.
 
싱크대를 파는 곳은 있었지만, 한샘은 설계를 바탕으로 부엌 공간 전체를 디자인하면서 차별성을 확실히 했다. 부엌 잘 만든다는 소문은 전국에 퍼져 제주도에서까지 서울 대조동 매장을 찾아왔다. 주문이 밀려 한달을 대기해야 시공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들으면서 결정적 전환점이 만들어졌다. 바로 소공동 미도파 백화점에 매장을 내고 부엌 설계와 가격표를 시범 아파트 입주자 주소로 보냈다. 주문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70년대 한샘은 부엌 가구로 빠르게 성장해 '입식부엌=한샘'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사진 한샘

70년대 한샘은 부엌 가구로 빠르게 성장해 '입식부엌=한샘'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사진 한샘

부엌이 집 안으로 들어와 부엌 바닥 면이 거실 바닥 면과 같아지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달라졌다. 당시엔 산업화 진전으로 인건비가 올라 입주 가사 도우미가 사라지던 때다. 주부 혼자 가사를 전담하면서 가사노동의 효율이 더욱 중요해졌다. 
 

자본금 200만원으로 시작, 연 매출 2조원 회사로

80년대에는 중동 건설 붐을 타고 살림이 핀 집이 많았다. 전국에 아파트가 계속 증가하면서 한샘의 호시절도 계속됐다. 이때 한샘의 대표 라인인 ‘유로’가 탄생했다. 기능에만 충실했던 부엌 가구가 예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소비자들이 좋은 반응을 보였다. 유로는 소비자 사이에서 ‘노랑 부엌’으로 불리며 40년 간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지켰다. 86년엔 미국에 수출하는 수준에 오르면서 자신감은 확고해졌다.  
80년대 한샘 부엌 가구 '팬시'. 과학적 동선을 고려한 시스템 키친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사진 한샘

80년대 한샘 부엌 가구 '팬시'. 과학적 동선을 고려한 시스템 키친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사진 한샘

50년 간 위기도 꽤 있었다. 82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처음으로 부엌가구를 수출했는데, 뜨거운 기후 때문에 싱크대 표면재가 떨어져 나간 사고가 이 중 하나다. 한샘은 망설임 없이 제품을 전량 한국으로 반송해 다시 납품했다. 8억원의 손해가 났지만, 거래처의 신뢰를 얻어 이듬해 수출 100억원이라는 실적을 올렸다.  
외환위기가 닥친 97년, 한샘은 한샘플래그샵 1호점인 서울 방배점을 냈다. 다들 인력과 사업을 줄일 때다. “한샘도 망할 수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새 분야의 진출은 회사의 경쟁력으로 쌓였다. 성장 정체기(2002~2009년)엔 리모델링 시장에 도전해 버티면서 새로운 동력을 찾아냈다. 
 
2014년 이케아가 국내 진출한 건 국내 가구·인테리어 업계엔 또하나의 전환기였다. “국내 가구업체가 다 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로 진입하면서 집에 대한 눈높이도 올랐다. 이케아가 오히려 국내 인테리어 시장 전체를 키우는 기폭제 역할을 하면서 시장이 규모가 커졌다. 이틈을 타 한샘은 연매출 2조 원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019년 모델인 키친바흐. 시대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한 게 한샘 부엌의 장수 비결이다. 사진 한샘

2019년 모델인 키친바흐. 시대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한 게 한샘 부엌의 장수 비결이다. 사진 한샘

50년 동안 아궁이 리모델링에서부터 스마트 키친 디자인까지 경험한 한샘이지만, 변신은 아직 진행 중이다. 2020년대엔 배달 음식이 급부상해 과거 집안의 중심이었던 '부엌'에 대한 요구는 또 변했다. 조리대는 좁아지고 소비자는 홈바와 같은 라이프 스타일 공간을 더 선호한다. 시대 정신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살피면서 빠르게 반응한 것이 한샘 부엌의 롱런 비결이다.     
 
최근 한샘의 화두는 ‘최단 기간, 최대 효과’를 내는 홈리모델링이다. 몇 달간 집을 고치는 불편과 부담스러운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소비자가 일주일 휴가를 다녀오면 새로운 집을 만나게 해준다는 컨셉트다. 한샘 관계자는 “단순히 가구를 파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주거 환경을 공간 패키지로 제안하는 형태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집에서 물·불 ·전기를 다루는 유일한 공간인 부엌은 리모델링하기 제일 까다로운 구역인데, 한샘의 50년 부엌 노하우가 앞으로도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