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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계엄군에 희생된 민간인, 교도소 습격 폭도로 둔갑시켰다

중앙선데이 2020.05.16 05:10 686호 8면 지면보기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둔 15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둔 15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80년) 5·18사태 때 시위대의 공격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였다. 그곳은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40년 전 신군부 날조 문건 입수
교도소 앞서 사망한 사람들의 위치
계엄군이 당시 표기한 지점과 달라

전두환(89) 전 대통령이 2017년 4월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 쓴 내용이다.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는 5·18 당시 시위에 참여한 광주시민을 “폭도”라 하며 ‘교도소 습격설’을 주장해왔다. 『전두환 회고록』에는 “북한이 광주에 있는 고정간첩망에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하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포착됐다”라는 북한군 개입설도 담겨 있다.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이란 5·18 나흘째인 80년 5월 21일부터 무장한 시민군이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주장이다. 5·18이 폭도에 의한 소요사태라거나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근거로 신군부 측이 악용해온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40주년 5·18기념식을 앞두고 교도소 습격이 허위임을 증명하는 신군부 측 문건이 나와 주목된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광주)교도소 지역 병력배치 요도(5·18)’에 따르면 당시 교도소 앞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피격 위치는 교도소 습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으로 확인됐다. 당시 교도소에 주둔한 계엄군이 표기한 사망지점은 교도소와 멀리 떨어진 광주~담양 간 도로 한복판이었다. 더구나 이들 사망지점은 교도소 외벽에서도 100m 이상 떨어져 교도소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외부에 2층 높이인 5m짜리 장벽에 둘러싸인 데다 교도소 입구 밖 50m 지점부터는 장갑차와 소방차·트럭 등으로 철저히 차단됐다. 계엄군이 ‘피격지점’이라고 표기한 지점이 문건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제 계엄군이 “시민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주장한 80년 5월 21일 오후 7시 30분에는 광주교도소 앞에서 4명이 총격을 당해 2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당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광주에서 볼일을 보고 귀가하던 담양 주민으로 확인됐다. 계엄군에게 희생된 민간인이 훗날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둔갑한 것이다.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교수는 “교도소 습격사건이 나중에 신군부가 꾸며낸 허위 사실임을 밝히는 핵심 증거가 40년 만에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문서에 남은 병력배치 현황도 교도소 습격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계엄군이 장갑차 등 핵심 병기와 버스·유조차 같은 차단막을 교도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도로에 집중해놓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계엄군의 이날 작전 자체가 교도소 방어가 아닌 광주~담양 간 도로를 차단하는 데 맞춰졌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5·18 당시 교도소 작전에 사격선수 출신의 병사들이 투입됐다는 점도 습격설을 부정하는 논리로 꼽고 있다. 훈련도 받지 않은 시민 몇몇이 특출한 사격능력을 보유한 저격병과 장갑차까지 포진한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주장 자체가 허위라는 분석이다. 김희송 교수는 “옛 광주교도소는 5m 높이의 외곽 담장으로 둘러싸인 데다 저격병까지 배치돼 시민들의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이라며 “광주교도소가 습격을 받은 곳이 아니라 계엄군의 일방적인 양민학살이 자행된 현장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진창일·이근평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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