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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가 세운 법화원, 재당 신라인에겐 ‘고향’ 같은 곳

중앙선데이 2020.05.16 00:21 686호 26면 지면보기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산둥반도

중국 양저우에 세워진 최치원 기념관. 최치원은 당나라의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에 수석 합격했다. [사진 홍성림]

중국 양저우에 세워진 최치원 기념관. 최치원은 당나라의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에 수석 합격했다. [사진 홍성림]

까마득하게 먼 변방을 여행하면서도 수시로 고향나라를 떠올리는 것은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렇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가까워질수록 우리 역사가 더 많이 보이는 것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의 연안을 북에서 남으로 여행하면서 산둥과 장쑤에서는 신라를, 저우산도에서는 고려를, 저장성에서는 왜구와 조선을 엮어서 짚어 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더 내려가 푸젠과 광둥에서는 20세기 전반의 독립운동을 만난다. 해협을 건너 대만에서 20세기 중반의 제주 4·3과 조우했던 것은 지난 회에 소개한 그대로다.
 

반도 동쪽 끝 성산두 인근에 위치
연안엔 신라방 등 공동체 등장
8~9세기에 황해권 국제무역 독점

‘신분 감옥’ 박차고 바다 건너
837년 재당 유학생만 216명
종6품 지낸 최치원 기념관도

이제 중국의 연안을 따라 남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나 코로나19가 길을 가로막으니 일부는 새로 답사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지난 십여 년의 여행은 길 위에서 읽었던 책이었고, 이번에 아쉬운 몇몇 곳은 책 속으로 가는 여행지라고 위로하면서 출발한다.
  
법화원에 머문 엔닌 찾는 일본 관광객도  
 
장보고가 중국 산둥반도에 건립한 법화원이 1988년 복원됐다. [사진 윤태옥]

장보고가 중국 산둥반도에 건립한 법화원이 1988년 복원됐다. [사진 윤태옥]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823~845년)을 내가 처음 찾아간 것은 2014년이었다. 산둥반도 동쪽 끝의 성산두(成山頭)에서 남쪽으로 60여㎞ 떨어진 않은 적산 기슭, 옛 지명으로는 적산포에 있다. 성산두에서 백령도까지 180㎞, 옛말로는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리였다. 요즘 사정으로는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기내식을 치우기도 전에 하강해야 한다. 산둥 인근에 살던 신라인들에게는 고향과 다를 바 없었을 법화원은 20여 년 만에 당나라의 폐불 정책으로 사라졌다. 천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1988년 복원돼 한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법화원에 세 번이나 머물렀던 일본의 구법승 엔닌을 찾아오는 일본인도 많다.
 
장보고의 해상 근거지는 지금의 완도 일대, 청해진(828~851년)이었다. 청해진 역시 유적지로 복원돼 당시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북방의 육로가 막힌 신라가 당나라와 해상으로 교류하기 위해 확보한 지역은 경기만 일대다. 애초에 백제의 땅이었으나 고구려가 점령했을 때에는 당항성을 설치했다고 한다. 신라가 점유했을 때 당은군이었고 당은포(唐恩浦)에서 배가 출항했다.  
 
구체적으로 충남 당진이거나 경기도 화성 일대라는 주장이 있다. 유적지는 화성의 당성 사적지가 있다. 당진은 지명으로는 당나라와 깊은 관계가 있을 터이나 유적지로는 발굴된 것이 없어 아쉽다. 화성의 당성 사적지에는 산성 일부가 복원돼 있다. 산성의 정상부인 구봉산에 오르면 바로 아래는 농지가, 조금 멀리는 해안선과 제부도, 대부도가 훤히 보인다. 서남쪽으로는 당진도 눈에 들어온다. 육지로는 가깝지 않아도 바닷길로는 한나절이면 닿는 하나의 권역이었을 것 같다.
 
산둥반도에서 우리 서해안까지 직선으로 건너는 동서 바닷길은 황해횡단 항로라고 한다. 연안항로는 서해안에서 평안도와 랴오둥반도를 지나 먀오다오 군도(발해만과 황해의 구분선)를 거쳐 산둥반도 북안의 펑라이(옛 지명 등주·登州)로 이어진다. 항로는 길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서해 흑산도에서 창강 하구 방향으로 건너는 황해사단(斜斷) 항로도 있다. 창강 하구나 항저우 앞바다(지금의 저우산군도)에서 일본 규슈로 가는 항로도 있다.
 
법화원에 세워진 장보고상. [사진 윤태옥]

법화원에 세워진 장보고상. [사진 윤태옥]

고대 황해에서 바다의 역사가 활발해진 데는 8~9세기에 걸쳐 바다를 건너다닌 신라인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무역에서 주도권을 잡기도 했다. 8세기 말에서 장보고 시대까지의 60여 년간은 신라인이 황해의 국제무역을 독점한 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신라인들이라지만 대부분은 본토 거주자가 아닌 재당 신라인들이었다. 중국 연안과 한반도 중남부 그리고 일본의 서부에 퍼져 신라인들의 상업 네트워크를 이루었다. 대륙의 연안에서는 신라방, 신라촌 등의 공동체까지 등장했다. 한 역사학자는 원조 코리아 타운으로, 또 다른 학자는 신라인 디아스포라로 묘사하기도 한다.
 
7세기에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8~9세기에 신라의 민간인 이주가 많아졌다. 유학생은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승려들은 구법을 위해 바다를 건넜다. 무장으로 출세해 보려는 이들도 있었다. 무역으로 생계를 해결하거나 부를 쌓으려는 상인들 역시 위험한 바다를 건넜다.
 
유학생의 경우 당의 인접국 가운데 신라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837년에 216명이 당나라에 ‘유학 중’이었다. 당나라에는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가 따로 있었다. 김운경이 최초의 빈공과 합격자(821년)다. 최치원이 수석 합격한(874년) 것은 한·중 양국에 모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록에 남은 빈공과 합격 신라인은 당대에 58명, 당 이후의 오대십국에서 32명이나 됐다.
 
빈공과는 당나라 내국인들이 응시하는 대과(大科)와는 달리 외국인을 위한 명예직 과거랄까. 그래도 소수는 관직에 진출했다. 김운경, 김문울, 김장 등은 정4품에서 종5품으로, 최치원의 시어사(종6품)보다 품계가 높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당나라 관리로서 출세까지 하기는 어려웠다. 관직 남발도 심했고 임기가 끝나면 사신의 임무를 부여해 귀국시키곤 했다. 일부는 현지의 문인들과 교류를 해서 역사에 남기도 했다. 최치원의 시문은 당대에 널리 알려졌고 그런 연유로 장쑤성 양저우(揚州)에는 최치원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신중국에서 외국인을 위한 기념관을 세운 것은 꽤 드문 일이다.
  
최치원, 아라비아 출신 이언승과 교유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바다를 오가던 승려도 적지 않았다. 원광(당나라 이전 남조의 진나라), 자장, 의상 등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활동했다. 원측, 승장 등은 당나라에 남기도 했다. 당나라에서 다시 인도까지 가기도 했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를 비롯해서, 삼국유사에는 인도 유학승들이 100여 명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현유는 지금의 스리랑카에 머물렀다. 신라 승려 두 명이 수마트라섬 서부에서 병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8세기에는 혜초, 원표 등이 인도로 떠났다.
 
무공을 꿈꾸며 바다 건너 당나라 군대에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설계두와 장보고 그리고 장보고의 친구 정년의 전기가 실려 있다. 장보고는 소속군대가 인원을 감축하자, 신라로 귀국해 청해진을 세웠다. 그 이후 해상왕이란 별칭을 얻을 정도로 큰 활약을 펼쳤던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일본인 승려 엔닌도 법화원에 세 차례나 머물렀었다. 엔닌은 견당사 일행을 따라 신라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나라에 머물렀다. 그가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신라방·신라촌·신라소·신라관·신라원(사찰) 등에 관한 세세한 기록을 담겨 있다. 엔닌의 여행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절반이 신라인이라는 것만 봐도 당시 바다를 오가거나 당나라에서 정착해 살던 신라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왜 신라인들은 위험한 바다를 건넜을까. 신라에는 크게 네 번의 기근이 들었다. 먹고살 것이 없어 어딘가로 떠나야 했던 백성들이 많았다. 재부를 좇아 바닷길 무역로로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왕위쟁탈전과 반란에 밀리기도 했다. 해적들에게 납치당해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유학, 구법, 무공 등으로 바다를 건넌 이들에는 6두품이 많았다. 신라는 그들에게 신분의 감옥이었던 것이다.
 
중국 연안을 여행하면서 신라인의 역사를 보며 ‘시야’라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당나라에서 관리나 문장가로 인정받은 최치원도 더 넓은 시야에서 볼 수 있다. 최치원이 빈공과에 수석을 했다지만, 대과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언승(李彦升)이란 외국인이 있었다. 이언승은 한자문화권이 아닌 대식국(아라비아) 출신이라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치원이 문장으로 유명하지만 일본인 아베노 나카메로(阿倍仲麻呂 698~770)도 있다. 그는 고위직인 종3품인 비서감, 산기상시를 역임했다. 시선 이백, 시불 왕유, 저광희 같은 시인, 명사들과 어울리다가 당나라에서 생을 마쳤다. 왕유의 친구 조형(晁衡)이 바로 아베노이다.
 
최치원 이야기에 이언승이나 아베노를 병치하면 속된 말로 김새는 일인가. 아니다.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최치원만 보았기 때문에 잠시나마 어색했을 뿐이다. 해상의 도적질조차 그렇다. 그 시대는 ‘왜구’가 출몰한 게 아니라 신라인 해적이 일본 해안지방까지 어지럽혔다. 해적은 왜인만인 것으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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