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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이해찬ㆍ설훈의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최후진술…“징역 구걸 않겠다”

중앙일보 2020.05.15 05:00

“시퍼렇게 젊은 놈이 여태 살아있어 죄송하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40년 전인 1980년 9월 12일 군법회의(군사법원) 재판정에서 체념한 듯 검사와 재판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란 음모’라는 누명을 쓴 상황에서도 최후 진술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신 죽기를 각오하며 신군부 세력이 대한 비판에 나섰다. 당시 이 대표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 계엄법 위반 혐의가 적용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14일 이같은 내용이 담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 피의자 23명의 최후 진술문을 공개했다. 문익환 목사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 심재철 전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고은 시인 등의 진술 내용이 담겼다. 당시 법정에선 녹음·필기를 허용하지 않아 방청석에 있던 가족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내용이 복원됐다.
 
19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중앙포토]

19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중앙포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지목한 사건이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를 포함한 20여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1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1년 뒤인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2004년에야 김 전 대통령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징역을 구걸하겠는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980년 내란 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연행됐다. 당시 이 대표는 군사법원 공판 최후진술에서 "내가 이 자리에서 징역을 구걸하겠는가"라며 신군부 세력을 비판했다. 사진은 이 대표의 1980년대와 현재 모습. [연합뉴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980년 내란 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연행됐다. 당시 이 대표는 군사법원 공판 최후진술에서 "내가 이 자리에서 징역을 구걸하겠는가"라며 신군부 세력을 비판했다. 사진은 이 대표의 1980년대와 현재 모습. [연합뉴스]

복원된 최후진술문에 따르면, 이 대표는 당시 법정에서 5·18 광주 민주항쟁을 언급하며 “가슴 아프게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다. 그런데 내가 이 자리에서 징역을 구걸하겠는가”라고 소리쳤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연행돼 군사법원에 선 이해찬(동그라미 속 인물) 더불어민주당 대표. [중앙포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연행돼 군사법원에 선 이해찬(동그라미 속 인물) 더불어민주당 대표. [중앙포토]

이어 검사와 재판부를 향해 “나는 김대중씨를 존경하지도, 개인적으로 알지도, 그의 정치노선이나 생각에 따르지도 않았지만 또 다시 합법을 위장하여 한 가정의 아버지가, 남편이 무참히 죽어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최후 진술 전날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은 데 대한 비판이었다.
 

“나 하나 죽더라도…”

1994년 국회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책임자 고소·고발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당시 민주당 설훈 부대변인이 고발장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4년 국회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책임자 고소·고발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당시 민주당 설훈 부대변인이 고발장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 자리엔 당시 고려대에서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도 있었다. 그는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며 최후 진술을 시작했다. 이어 “지금 몇몇 분들이 눈물을 보이는데 고문당한 걸 갖고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눈물은 광주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보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설 최고위원은 또 “군대에 총을 줄 때는 국민을, 국가를 지키라는 것이지 국민을 죽이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계엄군은 시민을 패고, 밟고, 시체를 자동차에 매달고 다닌 것으로 안다”고 비판했다. 설 최고위원은 이 대표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각오한 듯한 진술도 남겼다. 그는 최후진술 마지막에 “나는 나 하나 죽더라도 이 나라가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 군은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정치는 정치인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한 심재철 전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내란음모니 포고령이니 하는 것은 차치하고 내가 할 말은 이 조그만 주먹 안에 든 먼지만큼이나 많다”고 최후 진술을 시작했다. 이어 “허가 없이 집회를 열었고, 학생시위로 인한 불편을 국민에게 드려 죄송하다”며 “그동안 잘못된 점은 곰곰이 반성하였다.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는 게 김대중도서관측이 공개한 내용이다.
 
그러나 심 전 원내대표는 “당시 최후 진술에서 선처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가 15일 공개한 당시 군사법원 공판 기록에 따르면 “할 말은 많지만 학생 시위의 일부분을 맡았던 한 사람으로서 국민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하고, 데모를 하여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드려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진술한 것으로 돼 있다.
 

“민족 고난의 역사에 동참해 옥사하겠다” 

내란음모 사건 연루자 중 한명이었던 고은 시인은 “나에게 무기징역을 내려달라. 새우튀김처럼 꼬부라져, 말라 비틀어져 옥사를 하겠다”고 최후 진술을 했다. 그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선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데 내 이 옷을 찢으며 울분한다. 내 왼쪽 가슴에 달린 붉은 수인 번호에 카네이션을 달고 광주의 죽은 혼령을 위해 깊이 애도한다”는 말도 남겼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자료 사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자료 사진

당시 재야 운동권 세력의 상징이었던 고 문익환 목사는 최후 진술에서 “우리 국민은 주종 관계를 추방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장벽을 붕괴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노예의 입장에서 벗어나 주인이 돼야 한다는 나의 설교를 인용하면서 내란을 선동했다고 한다”며 “정부는 주종 관계도 그냥 두고 노동자와 농민도 노예의 입장에 그냥 두겠다는 것인가”라고 신군부를 비판했다. 그는  “나도 한 가지 기도를 할 것이 있다. 이 맺힌 매듭을 풀고 정치 보복의 반복을 중단케 해달라”는 말로 최후 진술을 끝맺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심재철 의원 측에서 보내온 1980년 당시 최후 진술 내용이 담긴 공판 기록. [심재철 의원실 제공]

심재철 의원 측에서 보내온 1980년 당시 최후 진술 내용이 담긴 공판 기록. [심재철 의원실 제공]

 
◇알려왔습니다=위 기사가 보도된 뒤 심재철 전 원내대표는 보도자료를 통해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반성문을 쓰거나 제출한 적이 없고, 공판 중 뉘우친다고 선처를 바란다는 진술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함께 그는 “공판 기록에는 설훈·이해찬 등이 선처를 바랐다고 명시돼 있다”며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과 관련해 일부 민주당 의원들을 영웅화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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