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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정장 덕 취업 성공"···'열린옷장' 속 사연 2만개

중앙일보 2020.05.15 05:00 종합 16면 지면보기
 밀실은 ‘중앙일보 레니얼 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도있는 착 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밀실 - 제32회> '열린옷장'에 쌓인 사연들

기증자 노모(36)씨가 직접 쓴 편지. 노 씨는 "내 자리를 채워줄 똑똑하고 젊은 친구들이 빛을 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증자 노모(36)씨가 직접 쓴 편지. 노 씨는 "내 자리를 채워줄 똑똑하고 젊은 친구들이 빛을 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둘째를 임신하니 ‘회사로 다시 못 돌아가겠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 코트와 남편 정장을 '열린옷장'에 보냅니다. 저를 대신해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어주세요.”

 
지난달 17일 노모(36)씨의 편지와 함께 남성정장 한 벌, 여성코트 한 벌이 ‘열린옷장’에 도착했습니다. 노씨는 대기업의 해외마케팅팀 10년 차 과장입니다. 지난해 9월 복직을 계획하던 중 둘째 임신 사실을 알게 됐는데요. 
 
회사에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7년 전 어머니께 선물 받은 코트와 남편의 정장을 열린옷장에 기증했다고 해요. 노씨는 “2년 동안 육아휴직을 하면서 승진하는 후배들을 보며 대견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며 “내 자리를 대신 채워줄 젊고 똑똑한 친구들이 이 정장을 입어줬으면 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열린옷장에는 3000벌이 넘는 정장이 기증됐다. 정유진 인턴

열린옷장에는 3000벌이 넘는 정장이 기증됐다. 정유진 인턴

열린옷장은 2012년 문을 연 비영리단체입니다. 면접을 앞두고 비싼 정장을 사기가 부담스러운 취업준비생 청년들에 정장을 공유하는 곳인데요. 지난 8년간 6800여명이 정장을 기증했고, 13만명의 취준생이 옷을 빌렸습니다.  
 
기증자와 대여자 모두 손 편지를 남깁니다. 그래서 8년 동안 열린옷장에 쌓인 편지가 2만통이 넘습니다. 열린옷장의 김소령 대표는 “요새 친구들은 스마트폰을 많이 써 손 편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A4용지 2장을 꽉 채운 감사편지도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절절한 편지 내용을 보다보면 직원들조차 감동받는 일이 잦다고 하네요.   
 
2만 개가 넘는 편지들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요? 중앙일보 밀실팀 기자들이 들여다봤습니다.
 

‘만년 탈락’ 승무원 지망생의 반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기증자 김수정씨가 정장과 함께 기증한 반지. '수백 번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정유진 인턴

기증자 김수정씨가 정장과 함께 기증한 반지. '수백 번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정유진 인턴

기증자들의 편지엔 본인의 취준생 시절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기증자 김수정(27)씨는 정장과 함께 본인의 반지도 기증했어요. 반지엔 ‘수백 번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있죠.
 
수정씨는 항공사 승무원 채용에 2년간 도전한 끝에 합격했습니다. 외워둔 자기소개를 틀리지 않길 면접장에서 떨면서 기도한 적도 있다고 해요. 면접 직전엔 너무 떨려 화장실에서 우황청심원 두 병을 ‘원샷’하기도 했죠. 모두 수정씨가 기증한 정장과 함께 한 추억이랍니다.
 

“취준 1년째에 탈락 문자를 받고 밤새 엉엉 운 적이 있습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시내로 나가 반지에 글귀를 새겼어요. ‘수백 번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몇십번이나 더 고배를 마신 끝에 바라던 일을 하게 됐죠.”  

 
기증한 정장을 두고 수정씨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까지 함께 해온 소중한 옷”이라며 “누군가 첫 시작을 이 옷과 함께해준다면 큰 영광일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도착한 정장 20벌 “사고로 휠체어에…입을 수 없게 됐어요”

기증자와 대여자들은 손 편지로 자신의 사연을 남긴다. 정유진 인턴

기증자와 대여자들은 손 편지로 자신의 사연을 남긴다. 정유진 인턴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죠. 6년 전 열린옷장에 정장 20벌이 한꺼번에 도착했습니다. 흔치 않은 대량 기증에 기뻐하던 김 대표는 편지 속 사연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졌다고 해요.  
 
사연의 주인공은 2012년 스노우보드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이민우(43)씨입니다. 민우씨는 정장을 입고 인천국제공항 VIP 라운지에서 외국인 고객을 응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고 이후 휠체어를 이용하게 되자 정장을 입을 일이 사라졌죠.  
 
민우씨는 좌절 대신 나눔을 택했습니다. 그는 “멋진 양복을 입고 훨훨 날던 나를 대신해서 꿈을 펼쳐달라”고 했습니다. 민우씨는 2018년 12월 난생 처음 할부로 샀다는 비싼 코트를 한 벌 더 보냈다고 하네요.
 

“내 아들딸 합격 기운을 받아서 취업하길”

기증자 김선희씨는 "우리 아이들 좋은 기운 받아서 원하는 곳에 취업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유진 인턴

기증자 김선희씨는 "우리 아이들 좋은 기운 받아서 원하는 곳에 취업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유진 인턴

본인의 옷만 기증하는 건 아닙니다. 취업한 자녀의 정장을 기증하는 분들도 있어요. 김선희(64)씨는 자녀들이 입던 정장을 40벌이나 기증했어요. 이 분은 기자에게 “아들은 5개월 만에 공기업에 합격하고, 딸도 쉽게 공기업에 들어가 청년들 취업이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뉴스에선 그렇게 취업이 어렵다 말하는데 내 자식들은 잘 붙었으니 이 정장으로 합격 기운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아직은 대여자에게 합격소식을 듣진 못했습니다. 코로나19로 상반기 공채가 미뤄졌기 때문인데요. 김선희씨는 “내가 백화점 가판대에 있는 옷을 사 입어도 애들한테는 마네킹에 걸려 있는 옷만 사줬다. 대여자가 취업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정말 고마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좋은 기운이 담긴 옷 입고 취준생들이 원하는 곳에서 꿈을 펼치길 바란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정장 빌렸던 취준생이 정장 기증자로

대여자 박수연씨가 손으로 직접 쓴 편지. 수연씨는 "열린옷장에서 빌린 '행운의 정장' 덕분에 면접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대여자 박수연씨가 손으로 직접 쓴 편지. 수연씨는 "열린옷장에서 빌린 '행운의 정장' 덕분에 면접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정장을 빌렸던 대여자는 취업에 성공한 후 열린옷장의 기증자가 되곤 합니다. 열린옷장이 지속될 수 있는 비결이에요. 취직한 대여자들은 편지에 “나도 취업을 하게 되면 꼭 정장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히곤 합니다.
 
열린옷장에서 정장을 빌렸던 박수연(21)씨는 지난달 온라인 잡지사에 취업했습니다. 수연씨는 ‘행운의 정장’ 덕분이라고 했어요. 기증자는 편지에 ‘두 번 만에 취업에 성공하게 해준 행운의 정장’이라고 적었답니다. 수연씨도 두 번째 면접에서 합격했고요. 수연씨는 “나중에 정장을 사면 꼭 기증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행운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김 대표는 “최근 기증자들이 ‘몇 년 전에 열린옷장에서 정장을 빌려 입고 합격했는데 어느새 기증하는 날이 왔다’는 사연을 많이 보낸다”고 전했습니다.
대여자 박수연씨는 "나중에 꼭 정장을 기증해서 행운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백경민 인턴

대여자 박수연씨는 "나중에 꼭 정장을 기증해서 행운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백경민 인턴

 
기증자분들을 인터뷰할 때마다 취준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기증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제가 취업 준비할 때 들었던 말 중에 제일 힘이 됐던 말은 그거예요. '어디든 당신의 자리는 무조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그 말을 꼭 전해주고 싶어요”

 
박건·최연수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백경민·이지수·정유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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