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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고장 난 시계

중앙선데이 2020.05.09 00:26 685호 31면 지면보기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고장 난 시계는 하루에 두 번씩은 맞는다. 그나마 시침 분침이 있는 아날로그 시계나 그렇지, 오전 오후가 따로 표시되는 디지털 시계가 제시간이 되는 건 한 번뿐이다. 멈춰 있는 시계는 결코 현실 세계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 여전히 내 시계가 맞다고 주장해 봤자 세간의 비웃음만 사기 십상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러겠냐고? 보수 야당인 미래통합당이 딱 이런 신세다.
 

왜 졌는지 아직도 모르는 보수 야당
국민의 시계에 맞춰야 그나마 희망

보수 야당의 문제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점이다. 왜 졌는지, 왜 패배를 거듭하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통합당 중진들을 만나 보면 전국 단위 선거 4연패에도 불구하고 2년 뒤 대선 때는 우리 시계가 맞을 거란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질 만큼 졌으니 이젠 반등하는 일만 남았다며, 정권 심판론이 다음엔 무조건 작동할 거라며, 수퍼 여당도 자살골을 넣을 게 분명하다며. 자성의 목소리가 당연히 클 줄 알았더니 웬걸. 진정한 반성과 성찰은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유례없는 참패를 당한 정당인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들의 막연한 확신은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길 바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역대 선거를 봐도 총선은 자멸하는 당이 패했지만 대선은 시대정신을 거머쥔 후보와 정당이 결국엔 승리했다. 상대의 지리멸렬은 필요조건이었을 뿐,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자신의 시계를 맞춘 자가 국민의 선택을 받았던 게 한국 정치의 오랜 경험칙이다. 그런데도 보수 야당은 아직도 여당을 궁지에 몰 수만 있다면, 반문재인 연대로 야권 통합만 이뤄낸다면 대선은 필승이란 도그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문(反文) 연대는 왜 연대하는지 반문(反問)하지 않는 연대”라는 당 안팎의 우려는 무시되기 일쑤다.
 
지난 총선 때도 유권자들의 주된 질문은 “통합당이 추구하는 보수의 가치는 뭐냐”였다. 왜 표를 줘야 하는지 설득해 보란 거였다. 하지만 통합당은 유권자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이 아니라 자기들이 오랫동안 고집해온 철 지난 신자유주의와 시대에 뒤떨어진 반공·종북 프레임이란 ‘모범답안’만 주야장천 제시하며 “내 시계에 맞추라”고 강요하기만 했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엘리트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요즘 시민들 눈높이가 국회의원보다 높아도 몇 배는 높은데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 것인가.
 
막말과 실언은 또 어떤가. ‘어떻게 말하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척도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며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더러운데 고상한 음식을 담는다고 손님이 맛있게 먹겠는가. 그렇게 욕을 먹고도 태구민·지성호 발언이 이어지니, 오죽하면 “이젠 보수 야당 정치인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안 믿는다”는 말까지 돌겠는가. 21대 국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양치기 소년단’ 신세가 돼버린 셈이다. 이러다 진짜 보수, 줄여서 ‘진보’ 정당의 자리는 더불어민주당에 내주고 통합당은 극우 정당에 만년 야당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다.
 
8일 선출된 통합당 원내대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수 야당의 시계가 고장 났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거다. 그것도 일회성이 아니라 국민이 “그만하면 됐다”고 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는 거다. 손에 담은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어쩌다 모든 신뢰를 잃게 됐는지 아프게 돌아보는 거다. 그런 뒤 태엽을 감아주든, 건전지를 갈아주든 멈춘 시계를 다시 살려 국민의 시계에 시간을 맞추는 거다. 새 지도부는 과연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장 난 시계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유권자들의 마음속 짙게 깔린 회의론을 걷어내는 건 오롯이 그들의 몫이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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