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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찾았던 '왕의 길'…이승만 방문 때 중장비로 넓혔다

중앙선데이 2020.05.09 00:02 685호 25면 지면보기
북한산은 만만하다. 품새와 높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툭하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숨 막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와중에도 국민의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받는다. 탐방객 수가 지난 3월에 67만5900명, 4월에 71만4633명으로 지난해보다 45% 늘었다. 그런데 이걸 아시는가. 늘어난 탐방객 중 많은 이들이 ‘왕의 길’을 다녀왔다는 것을. 
북한산 보현봉에서 바라본 북한산성. 안부(능선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대남문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사진 신향희]

북한산 보현봉에서 바라본 북한산성. 안부(능선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대남문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사진 신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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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북한산성을 쌓은 이듬해인 1712년 4월 10일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당시 19세)과 함께 북한산에 행행(行幸·임금이 대궐 밖으로 행차함)한다. 창덕궁에서 숭례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온 뒤 홍제교·구파발을 지난다. 

편액으로 본 북한산 이야기


 
박현욱 경기문화재단 연구사는 “숙종은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을 지나 수문~행궁~동장대~동문(대동문)을 거쳐 흥인지문을 통해 환궁했다”고 말했다. 이 코스가 ‘숙종의 길’이다. 숙종은 유사시 왕의 거처가 될 행궁을 살피러 갔다. 서울의 진산(鎭山·마을이나 도시를 품고 있는 산) 북한산을 산성과 문에 걸린 편액 중심으로 둘러봤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숙종의 길

숙종 행차를 앞두고 대서문 길을 정비했다. 오솔길 수준이었다. 지금처럼 널찍한 길이 난 것은 1958년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서문을 찾을 때였다. 신향희 북한산 자연환경 해설사는 “당시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미군 중장비를 동원해 길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대서문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편액(扁額)은 널빤지에 그림·글씨를 새긴 액자를 일컫는다. 현판(懸板)으로도 부른다.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이 건물의 내용, 즉 좌우명을 보여준다면, 현판은 그 건물의 고유 이름표이면서 해당 건물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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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산성을 찾기 직전 대서문 앞길이 널찍하게 뚫렸다. 이승만 대통령 뒤로 보이는 대서문에 자신이 쓴 편액이 보인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산성을 찾기 직전 대서문 앞길이 널찍하게 뚫렸다. 이승만 대통령 뒤로 보이는 대서문에 자신이 쓴 편액이 보인다. [사진 경기문화재단]

이 편액의 두인(頭印)은 ‘천지위사(天地爲師·하늘과 땅을 스승으로 삼다)’다. 편액 오른쪽 위에 자리 잡는 두인은 글쓴이의 신조와 사유를 담으며 ‘글씨의 시작’을 의미한다. 『열하일기』에는 ‘천지위사’가 청나라 건륭 황제의 낙관이라고 밝히고 있다. 

 
누가 글씨를 썼는지를 알려주는 낙관(落款)은 ‘전주이씨승만우남인신장수(全州李氏承晩雩南印信長壽)’다. 한국서예협회 관계자는 “두인은 편액의 오른쪽 위에, 낙관은 왼쪽 아래에 자리 잡아 편액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낙관의 ‘우남’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다. ‘인신’은 도장을 뜻한다. 그렇다면 ‘장수’는 왜 붙었을까.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글 새긴 이가 글쓴이를 위한 바람을 넣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장수를 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편액 뒤에 다른 편액이 있다. 경기도지사였던 최헌길의 ‘북한산성대서문중수기’다. 1958년에 고쳐 새롭게 태어난 대서문에 관한 이야기다. 건국과 치적도 새겨진 장문의 국한문 혼용체다.
북한산 대서문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에 썼다. 사진 왼쪽 아래의 낙관(편액의 왼쪽 아래에 위치)은 ‘전주이씨승만우남인신장수(全州李氏承晩雩南印信長壽)’이고, 사진 오른쪽 아래의 두인(편액의 오른쪽 위에 위치)은 ‘천지위사(天地爲師·하늘과 땅을 스승으로 삼다)’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대서문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8년에 썼다. 사진 왼쪽 아래의 낙관(편액의 왼쪽 아래에 위치)은 ‘전주이씨승만우남인신장수(全州李氏承晩雩南印信長壽)’이고, 사진 오른쪽 아래의 두인(편액의 오른쪽 위에 위치)은 ‘천지위사(天地爲師·하늘과 땅을 스승으로 삼다)’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대서문 문루 안쪽에는 최헌길 전 경기도지사가 쓴 '북한산대서문중수기'가 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대서문 문루 안쪽에는 최헌길 전 경기도지사가 쓴 '북한산대서문중수기'가 있다. 김홍준 기자

대서문 근처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던 A(83)씨는 “대서문은 일제 강점기 때 신도면사무소를 짓는 자재로 쓴다며 문루가 헐렸고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100여 년 전까지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1872년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총융청에서 고종(재위 1864~1907)에게 아뢴다. '간밤에 본성 대서문 내의 민가에 호랑이가 들어 사람을 물어 죽였다 합니다. 그래서 총과 활을 잘 쏘는 아병(牙兵) 30명을 장교가 거느리고 가서 사냥을 하고자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고종시대사, 고종 9년 6월 20일)
 

대서문 옆에 수문이 있었다. 숙종은 이 수문을 찾았다. 하지만 1915년과 1925년 홍수 때 사라졌다. 특히 1925년의 홍수는 을축년 대홍수라 부른다. 7월, 8월, 9월 석 달간 네 차례에 걸쳐 ‘한강의 흐름이 바뀌고 용산역 기차가 잠길 정도’로 내렸다. 조선총독부 한해 예산의 60% 가까운 돈이 수해 복구에 쓰였다. 북한산 속 ‘북한동’에서 대대로 살아온 A(91)씨는 “산에 없던 계곡이 생기고 일제 강점기 때 방치돼 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거나 일부 스러진 산성 내 성문의 문루, 행궁, 삼군문 유영지, 창고(상창·중창·하창 등), 성랑(城廊·초소), 사찰 등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대서문 북쪽으로 수문이 있던 자리.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됐다. 계곡 건너편에 보이는 성곽은 이 사진을 찍은 방향으로 이어졌다. 김홍준 기자

대서문 북쪽으로 수문이 있던 자리.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됐다. 계곡 건너편에 보이는 성곽은 이 사진을 찍은 방향으로 이어졌다. 김홍준 기자

‘숙종의 길’은 평탄하다. 때문에, 숙종은 걱정이 생겼다. 현장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내성 격으로 중성문을 쌓도록 지시한다. 중성문은 1714년에 들어섰다. 시신을 날랐던 작은 문도 만들었다. 중성문 옆에 수문도 만들었지만, 대서문 옆 수문과 마찬가지로 홍수 때 사라졌다.중성문의 편액은 1998년 신동영 당시 고양시장이 썼다. 두인은 없고 신동영인(申東泳印), 일청(一靑) 낙관이 아래위로 있다. 권상호 교수는 "중성문 편액처럼 이름은 백문(白文·하얀 글자), 호는 주문(朱文·붉은 글자)로 새기는 게 편액의 원칙"이라고 말했다. 
 
숙종은 행궁에 들른 뒤, 동장대로 향했다. 19세기 말에 허물어진 것으로 보이는 동장대는 복원하려고 해도 ‘모델’이 없었다. 그래서 수원 화성의 서장대를 본 따 서울 600주년 기념으로 1991년에 복원했다. 편액은 조순 당시 서울 시장이 썼다.

북한산성 중성문의 편액은 신동영 전 고양시장이 썼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 중성문의 편액은 신동영 전 고양시장이 썼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중성문은 숙종이 1712년 이 곳을 지나면서 축조를 지시했고 1714년에 세워졌다. 옆의 계곡 너머 성곽이 보이는 부분까지 수문이 있었는데, 대서문 옆 수문과 함께 1915년·1925년 홍수로 유실됐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중성문은 숙종이 1712년 이 곳을 지나면서 축조를 지시했고 1714년에 세워졌다. 옆의 계곡 너머 성곽이 보이는 부분까지 수문이 있었는데, 대서문 옆 수문과 함께 1915년·1925년 홍수로 유실됐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시에 걸쳐 있다. 박현욱 연구사는 “전체 길이 12.7km(수평직선으론 11.6㎞) 중 70%는 고양시가, 30%는 서울시가 관리한다”고 밝혔다. 그 때문인지 편액도 고양시 쪽 성문에는 경기도지사와 고양시장이, 서울 쪽에는 서울시장이 썼다. 
 
숙종은 대동문을 통해 환궁했다. 대동문 편액은 숙종이 썼다. 대성문 편액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숙종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다. 편액 좌측에 ‘숙종어필집자(肅宗御筆集字)라 새겨진 이유다.
대성문 편액은 숙종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다. 좌측에 '숙종어필집자'라고 써있다. [사진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대성문 편액은 숙종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다. 좌측에 '숙종어필집자'라고 써있다. [사진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대동문 편액은 대성문 편액과 마찬가지로 숙종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다. [사진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대동문 편액은 대성문 편액과 마찬가지로 숙종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다. [사진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영조의 길  

어릴 적 숙종과 북한산성을 찾았던 영조(재위 1724~1776)는 1760년 도성 창의문을 통해 북한산성 대성문으로 들어갔다. 행궁에 들어 숙종이 쓰던 포진(鋪陳·방석 또는 돗자리)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영조는 북한산성을 찾은 뒤 대성문을 닫아버렸다. 대신 옆의 소남문(혹은 문수문, 현재의 대남문)을 정문으로 승격시켰다.
 
'대'자를 얻은 대남문을 고쳐야 했다. 마침 ‘미침병’으로 군에서 방출된 한도형이란 자가 북문에 불을 질러 문루가 무너졌다. 부호군(종4품 무관직) 구선복은 영조에게 아이디어를 냈다. 
‘북한산성의 북문루를 현재 경영하여 고쳐 세우고 있으나…그 재목과 기와로 문수문의 문루를 새로 건립하는 것이 일이 매우 타당하기에 감히 이를 앙달합니다.’(비변사등록, 1765년 4월) 

구선복의 안이 채택되면서 북문은 현재까지도 문루 없이 북풍을 그대로 맞고 있다.
북한산 북문은 조선시대에 불에 탄 뒤 복구 자재를 대남문에 내주면서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북문은 조선시대에 불에 탄 뒤 복구 자재를 대남문에 내주면서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김홍준 기자

대남문의 편액은 서예가 효남 박병규(1925~1994)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1991년 대남문 문루가 복원되면서 쓴 것이다. 그런데 이 대남문 편액에는 낙관이 빠져 있다. 
 
북한산성 조사·연구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문화재에 개인의 낙관을 넣는 게 부당하다는 민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난 30년간 대남문을 200여 차례 찾았다는 한 등산객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낙관이 있었지만, 어느 날 사라졌다”고 말했다. 

북한산 대남문 편액은 서예가 박병규 선생이 썼다. 편액 오른쪽 위의 두인(사진 오른쪽)은 방회(放懷)인데,'생각을 깊이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게 원뜻이고 '새로운 생각을 위한 기존 생각의 정리'로 해석한다. 지난 4월 편액을 새로 단청하면서 두인도 기존의 흰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사진 서울도시기반시설본부]

북한산 대남문 편액은 서예가 박병규 선생이 썼다. 편액 오른쪽 위의 두인(사진 오른쪽)은 방회(放懷)인데,'생각을 깊이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게 원뜻이고 '새로운 생각을 위한 기존 생각의 정리'로 해석한다. 지난 4월 편액을 새로 단청하면서 두인도 기존의 흰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사진 서울도시기반시설본부]

하지만 두인은 살아있다. 두인은 방회(放懷)라고 찍혀있다. 권상호 교수는 “생각을 깊이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게 원뜻”이라며 “역설적이지만 새로운 생각을 위한 기존 생각의 정리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밝혔다. 현재 대남문은 기울어지고 틀어져 바로 세우는 공사가 1년 넘게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재개방 예정이다. 지난 4월 대남문 편액은 새로 단청을 입었고 낙관이 빠진 부분은 말끔히 메워졌다.
199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북한산 대성문 모습. 등산객들이 성곽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 중앙포토

199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북한산 대성문 모습. 등산객들이 성곽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다. 중앙포토

영조는 1772년 79세의 나이로 다시 북한산성을 찾았다. 1712년 숙종과 함께 올랐던 날과 같은 4월 10일이었다. 선왕인 숙종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는 창의문~대남문~행궁~대남문~창의문 코스였다. 영조는 총 세 차례 북한산성을 찾은 것이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청나라 “해적 대비하라” 전갈에 6개월 만에 북한산성 쌓아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 직후부터 한양과 가까운 곳에 산성을 쌓을 필요성을 느꼈다. 북한산성 축조의 배경은 복합적이다. 1637년 병자호란을 치르고 청나라와 맺은 정축약조에는 ‘(조선은) 성지(城池)를 개축·신축하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게다가 붕당정치로 조정 내 찬반이 갈리면서 이후 80년 가까이 산성 축조는 실행하지 못했다.  

 
한양의 인구는 1657년 8만명에서 1717년 19만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 불안도 커지며 도성민들은 안위를 걱정하게 됐다.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이 적용되면서 왕권 강화가 추진됐고, 이를 위해 군영 정비가 이뤄지면서 기존의 방위체계도 수도 외곽에서 도성으로 탈바꿈했다.
 
숙종은 임진왜란 때처럼 유사시 백성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문제가 있었다. 1710년, 청은 랴오둥반도 근처에서 해적이 출몰하자 조선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북한산성 축조 찬성파인 숙종은 탄력을 받았다. 근데, 신하들은 이번에도 찬반으로 갈렸다. 숙종은 결단을 내렸다.
  
‘왕이 말하기를 ‘계획은 비록 많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자 한다. 도성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의 땅이 있으니, 만약 지금 수축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하고 성을 쌓기로 결정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숙종 37년)
 

이미 삼국시대부터 터가 다져진 까닭에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속전속결 완성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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