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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이력서 갖고 와" 퇴사한 내게 천사가 찾아왔다

중앙일보 2020.05.08 09:00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59)

금융권의 명예퇴직을 보며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직장에서 인사팀장으로 재직할 때다. 하루는 사장이 부르더니 인력구조조정을 해야겠다고 한다. 대리급 이상 책임자를 대상으로 하되 주 타깃은 연봉이 높은 부차장급 이상 직원이었다. 기존 퇴직금에 추가로 일정액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명예퇴직 안이 마련되었다. 전 직원에게 이를 공지하였는데 신청은 매우 저조했다. 기한이 임박하자 사장은 구조조정 가이드라인을 주며 재촉했다.
 
오랫동안 같은 밥을 먹은 동료 직원을 대상으로 회사의 어려움과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면담했던 직원들은 사측 입장만 대변한다며 나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남아 있는 직원들의 마음도 뒤숭숭했다. 며칠 지나 진통 끝에 어느 정도 명단이 작성되었다. 정든 회사를 떠나야 하는 직원 명단을 바라보며 그들의 등을 떠밀고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스스로 부끄러웠다. 고심 끝에 구조조정 명단과 함께 나의 사표를 제출했다. 사장은 만류했으나 그것으로 구조조정은 종료되었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에서는 인위적인 인력구조조정을 억제하라고 하지만 기업으로서는 생존이 달린 문제다. [사진 pexels]

최근 코로나 사태로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에서는 인위적인 인력구조조정을 억제하라고 하지만 기업으로서는 생존이 달린 문제다. [사진 pexels]

 
사표를 내고 막상 회사를 그만두자 구조조정 대상자의 아픔이 한층 더 마음에 다가왔다. 나 역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모아놓은 돈도 부족해 한동안 직장생활을 더 해야 할 시기였다. 회사 문을 나오며 재취업을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사람을 뽑는 곳이 거의 없었다.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평소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며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어느 대학교의 예술대학원에 입학해 젊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금융업계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학교에 다닌다고 했더니 수일 내에 이력서를 갖고 오라고 한다. 그의 추천으로 인터뷰를 거쳐 모 그룹사에 재입사했다. 어려운 시기에 그는 나의 천사가 되어 주었다. 그 천사에게 보답하는 길은 나도 누군가의 천사가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그런 기회가 왔다. 하루는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지인이 내게 전화를 했다. 자신의 제자를 보낼 테니 한번 만나보고 도와주라는 부탁이었다. 며칠 후 40대 초반의 직장인이 나를 찾아왔다. 모 회사 반도체사업부의 직원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반도체 사업을 접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며 동료 몇 사람과 새로운 회사를 창업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반도체 사업의 전반에 관해 1시간 이상 내게 브리핑을 했다.
 
 
차를 한잔하고 다시 브리핑을 재개하려고 했을 때 나는 괜찮다며 그를 제지했다. 더 들어봐야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문이었다. 다만 그의 눈에 열정이 가득한 걸 보았다. 저런 열정이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성공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 자금은 얼마나 있냐고 물었다. 그는 동료들의 퇴직금을 합치면 어느 정도 된다고 답했다. 모자라는 자금은 내가 출연하기로 했다. 기술 개발은 그에게 맡기고 나는 회사의 정관 작성 및 창업에 필요한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투자설명회를 통해 몇몇 기관으로부터 30억 원의 투자도 받았다.
 
회사를 창업한 후 가끔 들려 애로사항 등을 경청했다. 2년이 지났지만 실적은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왔다. 과거 직장 상사였던 사람이 반도체 부품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합병제의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가 내민 회사의 재무제표를 검토했더니 연륜도 있는 데다가 회사 실적도 괜찮았다. 두 회사가 합치면 시너지 효과도 예상되었다. 우리는 합병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회계 법인에서 산정한 주식의 교환비율을 통해 회사를 합병했다.
 
합병회사는 때마침 불어 닥친 전자업계의 호황으로 매출이 쑥쑥 늘어났다. 우수한 실적을 바탕으로 증권시장에도 상장했다. 시장에서의 평가도 좋아서 주가가 꾸준히 올랐다. 회사를 퇴직하고 창업한 젊은 직장인과 실패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금을 지원해준 창업투자회사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주어졌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에서는 인위적인 인력구조조정을 억제하라고 하지만 기업으로서는 생존이 달린 문제다. 다 같이 망하기보다 부득이 조직을 줄여 재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개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회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타의에 의해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는 사람을 그저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 그들이 창업이나 재취업을 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당신도 누군가의 천사가 될 수 있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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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기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 필진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누구나 한번은 겪게 되는 죽음. 죽어가는 사람의 소원은 무엇일까. 의외로 돈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 오르거나 하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생을 살며 ‘조금만 더’ 하며 미뤘던 작은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은퇴 후 인생 2막에서 여가, 봉사 등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 죽음도 편하다고 한다. 노후준비엔 죽음에 대비하는 과정도 포함해야 하는 이유다. 은퇴전문가가 죽음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방법과 알찬 은퇴 삶을 사는 노하우를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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