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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강릉과 원산은 같은 영동권, 한반도의 연해주였다

중앙일보 2020.05.07 00:31 종합 22면 지면보기

평화의 철길 동해북부선

강원도 고성군 제진역 모습.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 판문점 선언 2주년을 기념해 이곳에서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이 열렸다. 빈 철로가 열차가 달리는 그날을 기다리는 듯하다. [사진공동취재단]

강원도 고성군 제진역 모습.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 판문점 선언 2주년을 기념해 이곳에서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이 열렸다. 빈 철로가 열차가 달리는 그날을 기다리는 듯하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주 강원도 고성군 제진역에서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이 열렸다. 4·27 남북 정상 판문점 선언 2주년을 맞이해 남북 철도 협력의 의지를 보인 것이다. 기념식에서는 ‘강릉→제진→원산→베를린’의 행선지가 적힌 기념 승차권이 배부됐다. 그런데 남북의 행선지가 흥미롭다. 강릉 출발, 제진 경유, 원산 도착. 그 의미는 무엇일까.
 

고려시대 때 동일 행정구역 속해
몽골 침략으로 함경·강원도 분리
원산의 개항 바람 강릉에도 영향
역사적으로 경제적 이해 함께해

동해북부선이란 본래 원산에서 부산까지의 동해안 철길로 계획된 동해선의 북부 구간을 가리킨다. 1927년 ‘조선철도 12년 계획’에 따른 동해선은 해방 전까지 부산~포항 구간과 원산~양양 구간이 이미 개통된 상태였다. 그런데 원산~양양 구간은 해방 당시에는 38선 이북에 속했고, 이 중에서 고성~양양 구간은 한국전쟁 결과 휴전선 이남이 됐지만 제3공화국 시절 폐지됐다.
 
대신 강릉~삼척 구간이 신설되면서 강릉은 현재 한국의 동해안 철도의 최북단이 됐다. 따라서 강릉에서 출발해 고성을 경유해 원산에 도착한다는 것은 현재 한국의 동해안 철도의 최북단에서 출발해 동해선의 분단 지점을 경유해 원래의 기점에 도착한다는 뜻이 된다. 더욱이 강릉과 원산의 동해선 연결은 원산이 현재 북한 강원도의 중심이니 남북 두 강원도의 만남을 의미한다.
 
본래 식민지 시기 조선 철도의 중심은 경성이었다. 1914년이면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부산·원산·의주·목포까지 갈 수 있었다. ‘Ⅹ자’ 모양의 한반도 간선 철도망의 완성이었다. 이에 비하면 동해선은 경성이 아닌 원산을 중심으로 하는 철도였다. 원산은 부산 다음으로 일찍 개항을 맞이했고, 청일전쟁(1894~1895) 당시 평양으로 군수품을 수송한 일본군 병참 기지였으며 함경선 완공으로 두만강 방면의 철도 이동도 가능했다.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에 거는 기대
 
행선지 ‘강릉→제진→원산→베를린’이 적힌 기념 승차권. [사진공동취재단]

행선지 ‘강릉→제진→원산→베를린’이 적힌 기념 승차권. [사진공동취재단]

동해선 착공에는 조선총독부의 철도 계획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의 수요도 작용했다. 원산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강릉 이북 강원도 각 군이 연합하여 철도기성회를 조직해 동해안 철도 부설을 청원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동해선 철도 부설이 지지부진하자 양양·강릉·삼척 지역이 연합하여 동해선의 속성을 요구했다. 원산 상권의 강원도 진출을 노리는 원산 측과 지역 개발을 원하는 강원도 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앞서 동해북부선 추진 기념식의 기념 승차권의 남북 행선지에 각각 강릉과 원산이 적혀 있었음을 말했지만, 원산을 중심으로 강릉까지의 동해안 지역이 동해선 부설에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적극적으로 청원한 사실이 흥미롭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원산과 강릉을 연결하는 공통된 지역성이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신라와 고려의 변경 문제를 유심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북한 원산시 풍경. 북한 강원도에 속한 원산은 역사적으로 강릉과 역사적 이해관계를 함께해왔다. [중앙포토]

북한 원산시 풍경. 북한 강원도에 속한 원산은 역사적으로 강릉과 역사적 이해관계를 함께해왔다. [중앙포토]

신라의 정복 군주 진흥왕은 북으로 팽창해서 함흥 근방의 황초령과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웠다. 신라의 행정 구역 최북단은 진흥왕 때에는 원산 남쪽 안변(고구려 비열홀·比列忽)까지, 문무왕 이후는 원산이 있는 덕원(고구려 천정·泉井)까지 미쳤다. 안변과 덕원은 신문왕 때에 정비된 9주 5소경 중에서 춘천을 중심으로 하는 삭주(朔州)에 속했다. 안변 이남의 동해안 고을은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명주(溟州)에 속했다. 원산이 강릉보다 춘천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원산과 강릉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동일한 행정 구역에 속하게 됐다. 이 둘이 속했던 지방은 처음 삭방도(朔方道)라 불렸고, 다시 5도 양계의 지방 행정 구역에서는 동계(東界)라 불렸다. 이 지방의 유력한 중심은 북쪽의 신흥 거점 지역 안변과 남쪽의 전통 거점 지역 강릉이었다. 몽골의 고려 침입 이후 약 100년간 북쪽은 몽골이 설치한 쌍성총관부(영흥)에 넘어가고 남쪽만 남아 지방 이름도 강릉도로 바뀌었다. 일종의 남북 분단이었다.
 
동해북부선 철도 강릉~제진 구간

동해북부선 철도 강릉~제진 구간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고 북쪽을 수복해 남북이 다시 하나가 됐지만 정체성의 통일은 쉽지 않았다. 강릉삭방도, 삭방강릉도로 이름이 오락가락하더니 끝내 삭방도와 강릉도로 분리되고 말았다. 강릉도는 다시 교주도(交州道: 춘천)와 합쳐져 교주강릉도가 됐다. 고려 말기 삭방도와 교주강릉도는 조선시대 함경도와 강원도의 원형이었다. 함경도의 새 중심 함흥은 쌍성총관부 관할이었다. 몽골 변수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분리에 기여했다.
 
몽골의 고려 침략 600년 후 이번에는 러시아 변수가 찾아왔다.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크림전쟁은 유럽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는 캄차카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도리어 러시아 세력이 흑룡강을 석권했다. 1860년 베이징조약은 러시아 연해주의 국제적인 인정이었다. 러시아 연해주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곡물과 가축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급부상했고 함경도의 경제적 역할이 급상승했다.
  
‘남북한의 강원도’  공유할 수 있을까
 
강릉시 명소인 선교장에 있는 열화당 건물. 러시아가 선물한 테라스가 있다. [사진 두피디아]

강릉시 명소인 선교장에 있는 열화당 건물. 러시아가 선물한 테라스가 있다. [사진 두피디아]

원산의 개항은 새로운 이정표였다. 조선의 원산과 러시아의 해항(블라디보스톡)이 연결되면서 최봉준이라는 걸출한 사업가가 출현했다. 그는 조·러 가축 무역의 일인자였다. 서해에는 장보고, 동해에는 최봉준이라 기억될 정도였다. 러시아 해항에 형성된 교민 사회를 위해 그는 해조신문사를 세웠다. 해조신문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의 주인공 장지연이었다. 원산에 불어오는 러시아 바람은 강릉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릉 선교장 열화당 건물에는 러시아가 선물한 테라스가 있다.
 
강릉에서 원산 가는 동해안 철길을 생각하며 이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생각해본다. 비록 몽골 변수와 러시아 변수에 따라 강릉과 원산은 강원도와 함경도의 서로 다른 정체성이 뚜렷해졌지만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서로 비슷했다. 넓은 의미의 영동이었다. 한반도의 연해주였다. (고려시대 한때 연해강릉도라 불렸다)
 
다만 변경이자 관문이었기에 근심거리가 많았다. 고구려와 신라는 안변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고려는 안변의 군대를 움직여 삼척에 쳐들어온 동여진 해적들과 싸웠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분노해 일어난 민용호의 강릉 의병은 원산으로 진격했다. 동해선이 착공된 1929년 그해에 원산에서는 그 유명한 ‘원산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제 평화와 안정의 새 세상을 이룩할 수 있을까. 강릉에서 원산 가는 철길로 미래의 번영을 앞당길 수 있을까. 남북분단의 오늘날 강원도 강릉과 강원도 원산이 하나가 돼 남북한의 강원도 깃발을 공유할 수 있을까.
 
동해안은 신라와 발해의 교통 중심로
네 귀 달린 항아리

네 귀 달린 항아리

우리나라 동해안의 교통 역사에서 중요한 주제는 신라와 발해의 교통로다. 오늘날의 동해안은 철길 따라 열차가 달리고 있지만 옛날에는 역로(驛路) 따라 말이 달렸다.  
 
『삼국사기』는 당나라 사람 가탐(賈耽)이 지은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801년)를 인용해 신라 천정에서 발해 책성부(발해 동경)까지 모두 39개의 역이 있었다고 전한다.
 
가탐의 지리 정보는 763~764년 당나라 사람 한조채(韓朝彩)의 발해·신라 견문에 근거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한조채는 발해 국왕을 책봉하는 사신으로 파견돼 발해에 갔고, 발해에서 신라로 사신을 갔다가 신라에서 당나라로 귀국했다.
 
한조채의 발해 여정은 당나라 등주를 출발해 압록강 하구, 고구려 환도성, 발해 서경, 발해 왕성에 이르는 코스였다. 신라 여정은 발해 왕성을 출발해 발해 동경, 발해 남경, 신라 천정, 신라 왕성에 이르는 코스였다. 귀국 여정은 신라 왕성을 출발해 중원경, 당은포를 거쳐 해로로 대동강 하구와 압록강 하구를 경유해 당나라 등주에 이르는 코스였다.
 
한조채는 발해 동경에서 울릉도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된 ‘네 귀 달린 항아리’(사진)가 울릉도에서도 출토됐는데, 이는 일본에 가는 발해 사람의 울릉도 경유를 의미한다.
 
한조채는 신라와 발해 사이의 동해안 교통로를 직접 이용한 당나라 사신이었다. 한조채와 8세기 동아시아 교통로는 흥미로운 연구 주제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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