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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국, 끝내 ‘상처입은 치유자’로

중앙일보 2020.05.06 00:53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

누가 과연 최고의 의사가 될 수 있을까. 가장 훌륭한 치료자는 어떤 조건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일까. 전례없는 인류 위기를 맞아 인간들의 신체적, 정신적, 환경적, 사회적 질병과 상처를 넘기 위한 치유와 회복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본다.
 

질병 앓아본 사람이 명의 되는 법
한국전쟁·외환위기 등 극복 경험
방역 성공 도취돼 개혁 태만 안 돼
‘상처입은 명의’ 모범 국가 돼야

그리스 신화는 헤라클레스로부터 치명상을 입었던 의약의 신 키론을 통해 상처와 명의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획기적 발견이었다. 플라톤은 ‘온갖 질환을 앓아보고 선천적으로도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가장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서는 아예 “(그의) 상처로 인해 (너희가) 치유를 받았다.”고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갖은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을 향한 과거 해석과 미래 소망의 드넓은 시야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맞선 한국의 방역에 대한 해외의 찬사가 넘친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한국을 ‘세계의 많은 국가가 따라야할’ ‘매우 성공적인’ ‘두드러진 본보기’라고 칭송한다. 한국인들도 국민적 자부심과 국격 상승을 체감한다. 이번에 다시 드러났듯 한국의 위기 극복은 뚜렷한 특성을 보여왔다. 위기 시 높은 시민 참여와 연대를 통한 위기 극복과 이후 국격 상승의 반복 경로를 말한다.
 
한국전쟁의 국가 존망 위기 때는 냉전 초기 자유진영에선 유일하게 세계적 공산 침략을 방어한, 자유 수호의 세계 초소국가로 칭송받았다. 막대한 희생을 통해 한국은 자유 세계의 일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후 빈국으로서 냉전대결·오일쇼크(1차·2차)를 거치면서는 수출진흥·중화학공업·새마을운동·에너지절약·경제개방을 통해 한 세대 안에 중진국으로 올라섰다. 외환위기 때는 초유의 연립 정부 수립과 구조조정·금모으기·남북화해·IT진흥을 통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조기에 상환했다. IMF관리체제의 조기종식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세계는 늘 위기와 도전, 가능과 도약의 무대였다. 이번 방역 성공의 경우 체계적인 의료·방역시스템과 공공보험 체제, 높은 IT기술 수준과 보급, 정부의 방향 제시, 의료인들의 전문성과 헌신, 그리고 시민들의 적극 협조가 어우러진 종합 대응의 산물이었다. 두드러진 시민 협조는 시민방역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방역 위기의 일차 극복이 개혁 중단과 사회 연대의 위기로 연결되어선 안된다. 자주 (거시)후유증은 (조기)성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장기집권, 경제성장과 군부독재, 외환위기 극복 이후 양극화 및 비정규직 급증을 꼭 유념하자. 특히 경제위기에 대한 응급 대응을 이유로 정부 관료와 기업 주도의 단기처방이 국가정책을 주도하며 사회경제 개혁의 회피통로가 되어선 안된다. 정부는 시민협조에 체계적인 개혁 패키지로 보답해야 하나 권력과 관료, 재벌과 노동에 대한 개혁담론은 벌써 실종되었다.
 
특히 단기처방이 구조개혁의 실기로 연결되어선 안된다. 무엇보다 권력과 부의 집중과 양극화를 가속화하는 제도와 법령과 사회구조를 혁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위기 시 세계선도국가로 도약한 경로들의 성공요인은 모두 권력과 부의 집중과 과점을 초래한 기제와 관행을 타파한 ‘민주적, 사회적 대타협과 대개혁’에 있었음을 명심해야한다.
 
국민들은 이번 총선을 통해서도 ‘민심 그대로’의 선거제도였을 경우-지역선거는 1당과 2당의 차이가 24석, 정당선거는 1·2당의 위치가 역전될 뿐만 아니라 (양당체제가 아닌) 분명한 4당체제로서- 명확하게 권력분산과 타협의지를 표출했다. 즉 민심(득표율)과 제도(의석수)의 왜곡을 정확히 인식하고 민심에 입각한 개혁과 타협의 정치, 연대와 공생의 사회경제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심과 제도(승자독식 및 의석 불비례)의 괴리로 인해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 최고 수준의 갈등국가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방역의 성공을 자만하기엔, 바이러스 도래의 원인(遠因)인 지구 오염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증가율과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을 포함해 한국은 선두국가군이다.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같은 선진국들의 두 배다. 미래 희망과 생명의 지표, 즉 자살율과 출산율과 청년사망 원인은 최악 수준이다. 산업재해도 그렇다. 0점대 출산율(0.98/0.92)은 인류사 초유다. 가공할 인간 지표들이다. 우리의 성취에 대한 자부심은 당연하나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 책임도 마찬가지로 무겁다.
 
누천년 주권국가·문명국가를 향유해온 한국인들에게 식민주의와 한국전쟁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상처였다. 상처입은 인류요 상처입은 국민이었다. 그러나 전후 한국의 놀라운 회복과 발전은 이들이 ‘희생자 의식’과 ‘피해자 의식’에만 머물러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상처의 크기 못지않게 상처 극복도 세계 지평이었다.
 
상처를 치유의 토대로 승화시킨 한국을 이제 명의로 빚어보자. 모두를 존중하고 모두로부터 존중받는 모범국가를 말한다. 사례(case)에서 범례(example)로, 범례에서 표준(standard)으로 비약을 궁구하자. ‘상처입은 치유자’로, ‘상처입은 명의’로.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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