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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의 시시각각] 태영호 때리기보다 100배 중요한 일

중앙일보 2020.05.05 00:36 종합 26면 지면보기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2008년 국가정보원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평양에서 해외 의료기관으로 보내는 김정일의 뇌 사진을 해킹으로 입수했다는 사실이 한 월간지의 취재망에 걸렸기 때문이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구축해 놓은 정보망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문책 인사가 줄을 이었다는 후문이다. 국정원은 김정일의 여생이 길어야 5년일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정작 그가 2011년 숨졌을 때는 북한 발표를 보고 알았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였다. 북한 지도자의 생사 정보는 그만큼 파악하기 어렵고 방심은 금물이란 얘기다.
 

인포데믹의 감염원은 김정은
수퍼 전파자는 CNN 등 외신
진짜 유고 가능성에 철저 대비를

김정은의 20일간 잠적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정부는 특이 동향이 없다는 판단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평가받아 마땅한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기를 바란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해프닝으로 끝난 결말에 있는 게 아니라 북한 체제의 폐쇄성과 불가측성을 재확인시켜 준 과정에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핵을 가진 정권의 폐쇄성과 불가측성은 위험성의 동의어다. 김정은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잠적 소동을 벌여 세계를 상대로 교란전술을 펼칠 수 있다. 또 한 가지, 김정은의 재등장 화면에서 필자가 눈여겨본 것은 김정은의 걸음걸이보다는 김여정이 테이프 커팅 가위를 다소곳이 받쳐들고 김정은에게 전하는 동작이었다. 유사시 대리 통치를 할 것이라는 실질 권력 2인자가 1인자에게 그런 수발을 하는 모습이야말로 북한의 민낯이다. 그런 체제의 지도자와 밉든 곱든 협상하고 머리싸움도 하며 말싸움, 눈치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숙명이다.
 
이런 엄중한 상황을 감안하면 김정은의 건재가 확인된 다음 날 청와대의 언행은 적절했다고 보기 힘들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 대변인은 차례로 기자들 앞에 나서서 “대북 소식통보다는 한국 정부당국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왜 우리 정부의 압도적인 정보력과 노하우를 대북 소식통과 비교해 스스로 격을 낮춰야 하나. 태영호와 지성호 두 당선인의 경솔했던 언행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청와대가 정치 초보자에 불과한 탈북자 때리기에 앞장서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된다. 여당 대변인의 몫으로 돌려도 될 일 아닌가.
 
대신 청와대는 국민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어야 옳다. “정부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 정보망을 총동원하고 우방국과의 협력 체제도 가동했다. 국민이 많이 놀랐겠지만 모든 것을 속 시원히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 달라. 북한 특성상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재발할 수 있다. 정부는 국가안보와 국민안전에 최선을 다할 것이니 국민도 불확실한 정보에 흔들리지 말았으면 한다.”
 
이번 인포데믹(정보 전염병)을 일으킨 감염원은 김정은이다. 수퍼 전파자는 CNN을 비롯한 서양의 유력 언론이었다. 유력 정보원의 전언이라고 하면서 “김정은은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코마 상태”라고 한 장성민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심혈관 수술은 맞는 것 같다”고 한 윤상현 국회 외통위원장 등 전·현직 정치인들을 통한 ‘지역사회 감염’이 뒤따랐다. 중국발 SNS에 나도는 풍문을 전한 몇몇 일본 매체들도 감염 경로로 한몫했다. 그런 식으로 인포데믹이 확산되는 동안 정부는 방역 노력을 다 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정보 자산에 손상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부가 더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했더라면 CNN 오보의 확대재생산을 초기에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뒤늦게 대통령 특보인 문정인 교수가 원산 체류 정보를 바탕으로 폭스뉴스에 인터뷰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잠적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그게 숨바꼭질 놀이가 아니라 진짜 유고일 가능성에 대비한 방책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태영호 때리기보다 100배 더 중요한 일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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