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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의 영화몽상] 레드카펫의 미래

중앙일보 2020.05.05 00:15 종합 20면 지면보기
이후남 문화디렉터

이후남 문화디렉터

지난해 이맘때 ‘기생충’을 세상에 처음 소개한 칸영화제는 엄격한 복장 규정으로도 유명하다. 팔레 드 페스티발(축제 궁전)에서 열리는 대규모 상영 때는 배우·감독만 아니라 누구나 정장 차림이 필수다. 남자는 나비넥타이가 기본. 여성은 하이힐 대신 바닥이 평평한 스니커를 신었다고 입장을 거부당한 사례도 있다. 참석자 입장에선 왕족을 알현하는 것도 아니요, 영화 한 편 보는데 왜 이 난리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에 십상이다.
 
구경꾼 입장에선 이게 곧 볼거리다. 특히 안 그래도 이름난 스타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줄지어 레드카펫에서 들어서면 환호와 카메라 세례가 쏟아지게 마련이다. 25년 전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할 때만 해도 이런 풍경은 남의 나라 얘기 같았는데 이제는 국내 영화제나 각종 시상식에도 레드카펫이 빠지면 섭섭하다.
 
스타는 종종 옷으로도 말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처럼 다들 최고급 디자이너 의상을 입고 나오는 자리에서 가끔 벌어지는 일인데, 10만원대 기성품을 멋지게 소화한 스타가 등장하면 그게 곧 메시지다. 2년 전 골든글로브 시상식 때는 스타들이 검은색으로 의상을 통일해 할리우드 성폭력 고발 사건, 즉 미투 운동에 지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막식 사회자 이하늬·정우성이 레드카펫으로 입장하는 모습. [중앙포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막식 사회자 이하늬·정우성이 레드카펫으로 입장하는 모습. [중앙포토]

이제 대다수 영화제의 시간표는 멈췄고, 레드카펫도 사라졌다. 매년 5월 국내에선 전주국제영화제가, 해외에선 칸영화제가 한 해 영화제 사이클의 시작을 알리곤 했지만 코로나19 확산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언제든 팬데믹이 재연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마당이라, 칸처럼 이미 미뤄진 영화제는 물론이고 가을의 베니스·토론토·부산 등의 영화제도 예년처럼 열릴 수 있을지 장담이 어렵다.
 
상업영화가 그렇듯 영화제도 온라인에 눈을 돌리는 중이다. 전주는 한차례 연기한 영화제를 이달 말 최소 참석자로 개막하되, 준비한 프로그램을 온라인에 소개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다. 내년 초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은 극장 개봉작을 고수하던 규정을 바꿔 온라인 개봉작에도 작품상 출품자격을 주기로 했다. 과연 예년처럼 치열한 아카데미 수상 경쟁이 벌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기생충’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세계 각지, 특히 미국의 크고 작은 숱한 영화제에 선보여 발 빠른 마니아 관객들의 입소문을 탔다. 비영어권 영화 최초의 아카데미 작품상이라는 새로운 역사는 그렇게 영화제들로 이뤄진 생태계의 연쇄 효과에 힘입었다. “자막이라는 1인치 장벽”은 이 영화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상업 영화관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영화와 새로운 관객을 이어주는 것이야말로 영화제라는 감식안이 지닌 힘이다. 레드카펫은 사라질망정 영화제가 생존하기를 바라는 이유다.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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