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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민주당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앙일보 2020.05.04 00:36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했다. 손자병법에 나온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미래통합당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소리를 듣더라도 더불어민주당에서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민주당의 두뇌 집단인 민주연구원은 2019년 4월 ‘대한민국 중심 정당의 혁신적 포용노선-더불어민주당의 길’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민주연구원 소속인 정치학 박사 이진복·박혁씨가 작성했다. 요즘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는 통합당 사람들이 읽어볼 만하다. 패자가 승자에게서 교훈을 얻어 다음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는 역사에서 비일비재하다.
 

1년 전 민주연구원의 전략보고서
지지율 80%…일본 자민당이 모델
통합당, 지피지기에 능한 리더를

보고서는 통합당(보고서 작성 시엔 자유한국당)의 현실에 대해 풍부하고 냉정한 관찰을 담고 있다. 민주당한텐 자체 선거 역량을 점검하고 이기는 데 필요한 실천적 태도를 제시했다. 100쪽이 넘는 보고서를 읽다 보면 민주당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구나,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지피지기한 결과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보고서의 분류법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은 주변 정당이다. 주변 정당은 “오직 반사이익에 골몰해 집권 여당의 실수만 바라면서 생활인의 절박한 삶의 문제를 외면하는 ‘생활불감 정치’와 시끄러운 소수에 영합해 민심과 당심이 끊임없이 괴리되는 ‘민생불감 정치’를 강행”하는 당이다.
 
여론조사 수치로는 잡히지 않는다며 선거 막판까지 통합당이 기대했던 숨은 표, 이른바 ‘샤이 보수’에 대해선 “수줍어서 말하지 않는 보수가 아니라 보수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보수”로 비틀어 정의했다. 1년 전의 이 판단은 선거 결과 사실로 입증됐으니 과학성과 통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빅데이터 기법으로 네이버에 게재된 정치기사의 댓글 93만573건을 분석해 보니 보수의 연관어에 종전의 ‘경제성장’ ‘진정성’ ‘안보’ 등의 긍정적 단어는 완전히 사라지고 ‘거짓말’ ‘비리’ ‘부끄럽다’ ‘더럽다’는 부정적 단어가 압도적”이라는 게 판단의 근거다. 통합당과 그 지지자들은 민주연구원의 보고서가 불편하긴 해도 상당한 진실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보고서는 민주당이 한국의 중심 정당이 돼야 한다고 미래 비전을 적시했다. 중심 정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했던 80%의 지지”를 받는 생활정치 정당이다. ‘국민 80% 지지 정당’은 정치 생태계를 1당 장기 지배의 과두정치 체제로 재편하겠다는 야심을 수치로 표현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양당 정치의 붕괴를 의미한다. 여야 간 견제와 균형의 정치는 사라진다. 통합당은 제1 야당에서 군소 정당으로 전락한다.
 
보고서는 지지율 80%의 중심 정당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당이 사실상 여야의 역할을 모두 한다. 여야 정권 교체가 중심 정당 내에서 일어나는 1.5당 체제다. 야당은 수권능력을 상실한 항의 정당, 생존이 우선인 불임 정당으로 전락한 0.5당이다.” 민주당은 일본 자민당을 1.5당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1년 전 민주당이 만든 지피지기 보고서는 거의 그대로 현실이 됐다. 통합당이 비참해진 이유는 지피지기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지금 구도가 굳어지면 내년 부산시장 보궐선거나 내후년 대선·지방선거에서 통합당이 정권을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배에 큰 구멍이 나 침몰하고 있는데 서로 방향타를 잡겠다고 다투는 통합당의 풍경은 쓴웃음을 자아낸다. 차기 야당 지도자는 누가 선장의 자리에 오르든 먹고사는 문제를 1순위로 해 상대방 정세 파악에 기초해서 자신의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민주당의 보고서엔 허점도 있다. 선거 승리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민주당 정부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없다. 비용과 지속가능성 문제가 누적되면 정권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통합당은 이 빈틈을 노려야 한다. 빈틈은 준비된 자에게만 보인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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