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4〉
![1957년 5월 24일 오후. ’미군의 인권 경시를 항의한다“는 팻말을 들고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청궁(成功)고중 학생들. 청궁고중은 장징궈가 설립한 청년구국단의 중심기지였다. 오른쪽 첫째가 훗날 대 작가로 명성을 떨친 천잉쩐(陳映眞). [사진 김명호]](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005/02/c0cf22ad-52a5-4397-aafc-bf48084a60d8.jpg)
1957년 5월 24일 오후. ’미군의 인권 경시를 항의한다“는 팻말을 들고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청궁(成功)고중 학생들. 청궁고중은 장징궈가 설립한 청년구국단의 중심기지였다. 오른쪽 첫째가 훗날 대 작가로 명성을 떨친 천잉쩐(陳映眞). [사진 김명호]
미, 한국전 터지자 대만에 원조 쏟아
대륙과 완전 분리된 군사기지 추진
장제스 부자는 대륙 수복 꿈 들떠
‘살인자는 무조건 사형’ 중국 철칙
민간인 살해 미군 무죄에 민심 폭발
궁지 몰린 미, 장징궈에 책임 돌려
중국주재 외교사절들은 국민당과 행보를 함께했다. 미국대사 스튜어드는 다른 외교사절들과 달랐다. 난징을 떠나지 않았다. 미국이 국민당을 버릴 수 있다는 신호를 중공에 보냈다. 스튜어드는 겉모습만 미국인이었다. 선교사의 아들로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나 초등교육도 중국학교를 다녔다. 우유보다 콩국이 입에 맞는, 반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현재의 베이징대학 자리에 옌칭(燕京)대학을 설립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중공 지휘부에 제자들이 널려있었다.
마오쩌둥은 스튜어드의 손길을 뿌리쳤다. 중공과의 관계개선에 실패한 미국은 대만으로 천도한 국민당에게도 희망을 걸지 않았다. 1950년 초, 미 국무부의 대만 문제 해결안을 소개한다. “반공, 대만 보호, 미국과의 연합을 공약으로 내건 군사정변(政變) 획책을 해볼 만하다. 지휘관으로는 대만방위사령관 쑨리런(孫立人·손립인)이 적합하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연금이나 해외 방축(放逐)등 여러 방법이 있다.”
![대만에 반미운동이 벌어지자 대륙은 외세의 간섭이 없는 중국의 평화로움 알리는 이런 선전 사진을 인민화보에 게재했다. [사진 김명호]](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005/02/54dd640c-d206-4846-84dc-22280a2ecdf3.jpg)
대만에 반미운동이 벌어지자 대륙은 외세의 간섭이 없는 중국의 평화로움 알리는 이런 선전 사진을 인민화보에 게재했다. [사진 김명호]
미국에 대만은 애지중지하는 애물단지였다. 입안에 꽉 찬 왕 눈깔사탕처럼 씹기 힘들었다. 국무부는 유엔의 신탁통치안을 구상했다. “고문 덜레스가 대만에 가서 장제스의 하야를 건의하고, 대만은 유엔의 신탁통치를 수용한다. 유엔이 정식으로 대만을 관리하기 전까지 미국 해군이 대만을 보호한다.”
6월에 접어들자 국무부의 계획은 더욱 구체화했다. 요점만 소개한다. “미국의 대만 방위를 위해 장제스와 국민당 고위층은 대만을 떠나야 한다. 대만의 민정과 군사문제는 미국이 지정하는 대륙 출신과 대만인이 담당토록 한다. 상술한 두 가지가 해결되면, 미국 해군은 중공의 대만공격과 대만의 반공대륙(反攻大陸)을 저지하기 위해 대만해협을 봉쇄한다. 장제스가 끝까지 거부하면 미국은 밀사를 파견해 극비리에 쑨리런과 접촉한다. 미국의 지지를 확신한 쑨이 군사정변으로 대만 전역을 장악하면 중단됐던 경제와 군사원조를 재개한다.” 한마디로 대만에 친미정권을 세워 대륙과 분리하겠다는 의도였다.
![1950년대 타이베이 거리에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사진 김명호]](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005/02/9238059b-1139-4c77-a661-00fb16553ca2.jpg)
1950년대 타이베이 거리에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사진 김명호]
원조 짜내려 친미파 육군 총사령관 임명
![미 7함대 사령관의 방문을 받고 환담하는 장징궈. 1960년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https://pds.joins.com/news/component/joongang_sunday/202005/02/f151871d-d156-4486-ac87-c733d36da66c.jpg)
미 7함대 사령관의 방문을 받고 환담하는 장징궈. 1960년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1950년대 대만은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 큰일을 작게 만들고 작은 사건을 크게 키우는 것이 가능한 시대였다. 사소한 일은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1957년 3월에 발생한 미군 상사 레이놀드의 류즈란(劉自然·주자연) 살해도 미군 주둔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보도 통제와 미군과 합의, 유족에게 충분한 보상 등으로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발생에서 재판이 열리기까지 2개월간 대만 언론은 자유를 만끽했다. 온갖 보도를 다 내보냈다. 중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재판정은 레이놀드 찬양 일색이었다. 변호인은 물론이고 검찰관까지 살인범을 끼고 돌았다. “레이놀드는 정직하고 용감한 군인이었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부산에서 압록강까지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죄를 선고하자 방청석의 미국인들은 만세를 불렀다. 수천 년간 중국인들에겐 불변의 철칙이 있었다. 살인자는 무조건 사형이었다. 정당방위는 주장해 봤자 통하지 않았다. 대만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난동이 벌어졌다. 미국은 장징궈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