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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명 사망, 이천의 비극···"유증기 가득" 2008년 사고 판박이

중앙일보 2020.04.30 00:50 종합 1면 지면보기
29일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의 한 물류창고 공사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화재 당시 현장에는 78명이 작업을 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자정 현재 38명의 사상자가 발생 했다. 작업 인력 중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있어 인명 피해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뉴시스]

29일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의 한 물류창고 공사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화재 당시 현장에는 78명이 작업을 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자정 현재 38명의 사상자가 발생 했다. 작업 인력 중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있어 인명 피해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뉴시스]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를 집어삼킨 화마는 가족의 생사마저 갈라놓았다. 29일 이천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조모(54)씨는 “28세 조카가 아버지와 함께 화재 현장에서 일했다”며 “불이 난 옆 동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빠져나왔지만 아들은 미처 못 빠져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물류창고 지하 공사장서 대형화재
우레탄 작업중 용접, 발화·폭발 추정
“유증기 가득” 2008년 사고 판박이
10명 중경상, 사망자 더 늘 수도

경상입은 형은 의식 되찾자마자
“동생 사망한 듯” 소식에 현장으로

“우레탄 연기 한 모금도 치명적”
샌드위치 패널도 유독가스 원인

연휴 앞두고 78명 마무리 작업
지하서 발화, 사망자 지상2층 많아

장례식장 앞에는 손에 까만 재를 잔뜩 묻힌 아버지가 작업복을 입은 채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현장 인근 체육관에 마련된 피해 가족 대기실에서 “아들 생사를 파악해 달라”고 소리쳤지만 아들의 행방은 확인할 수 없었다.
 
29일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신축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는 이날 자정 현재 38명의 사망자와 10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소방당국은 우레탄 작업 중 발생한 유증기에 용접 불티가 옮겨붙어 폭발하면서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고, 사상자가 추가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내다봤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등에 따르면 불은 이날 오후 1시32분쯤 물류창고 신축 공사 현장 지하 2층에서 시작됐다. 불길이 갑자기 솟구치면서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였다고 한다. 폭발음이 10여 차례 연속 들렸고 곧이어 현장이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는 전언도 있었다.
 
불이 나자 일부 인부들은 대피했지만, 상당수가 대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당국은 화재 발생 20분 만인 오후 1시53분 ‘대응 2단계’를 발령하고 헬리콥터와 펌프차 등 장비 90대와 소방관 410명이 투입해 오후 4시30분쯤 큰 불길을 잡았다.  
  

이천서 함께 일했는데…재투성이 아빠 “아들 찾아달라” 

 
화재로 사상자가 발생한 물류창고 시공사 관계자가 29일 이천 체육관에서 유가족들에게 사과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뉴스1]

화재로 사상자가 발생한 물류창고 시공사 관계자가 29일 이천 체육관에서 유가족들에게 사과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뉴스1]

당시 이 건물 안에선 9개 업체 근로자 78명이 건물 내부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건물 내부에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됐고 인부 몇 명도 연락이 닿지 않아 사망자 수가 40명 이상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인명 피해가 컸던 원인으로 화재 시 유독가스를 발생시킨 우레탄폼을 꼽았다. 서승현 이천소방서장은 “지하 2층에서 우레탄 도포 작업 중 유증기가 폭발하면서 불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워낙에 크게 폭발해 현장에 있던 근로자들이 피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용접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는 근로자의 전언도 있었다.
 
우레탄폼은 용접 불똥만 튀어도 발화 위험이 높은 가연성 물질이다. 단열 효과가 뛰어나지만 연소점이 낮아 작은 불씨에도 불이 잘 붙는다. 불에 탈 땐 ‘시안화수소’란 치명적인 맹독성 가스를 내뿜는데 한 모금만 들이마셔도 위험하다.
  
용접 때 소화기 비치 규정 어겼나 조사
 
29일 화재로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한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앞에서 구급차들이 사상자 이송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관련 가용 자원을 모두 동원해 마지막 인원이 구조 될 때까지 인명 구조 및 수습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연합뉴스]

29일 화재로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한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앞에서 구급차들이 사상자 이송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관련 가용 자원을 모두 동원해 마지막 인원이 구조 될 때까지 인명 구조 및 수습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연합뉴스]

제진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우레탄폼 유독가스는 목재의 수십~수백 배라고 보면 된다”며 “들이마시면 눈을 뜰 수 없고, 의식을 잃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화재에 취약한 샌드위치 패널을 사용했다는 점도 사고를 키운 원인으로 지적됐다. 서승현 서장은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물류창고는 ‘화약고’와 같아 불이 나면 진화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샌드위치 패널 가운데 들어가는 단열재로 불에 잘 타지 않는 난연성 제품 대신 값싼 스티로폼이나 우레탄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화재를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해당 건물은 준공 전이라 내부에 스프링클러 등 소방 장비도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 근로자는 “이 현장은 유난히 안전관리가 안 돼 있었다. 다른 곳보다 심했다”고 말했다.
 
사망자들은 각 층에서 발견됐다. 지상 2층에서 가장 많은 18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지하 1·2층과 지상 1·3·4층에서는 각각 4명씩의 사망자가 나왔다. 소방당국은 불길과 매연이 위로 솟아오르면서 생긴 유독가스 때문에 지상 근로자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안타까운 사연은 줄을 이었다. 유독가스를 마셔 인근 파티마병원에 입원했던 민모(59)씨는 정신을 찾자마자 함께 일했던 동생을 찾았다. 하지만 경찰로부터 “동생이 사망한 것 같다”는 말을 듣고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한 유가족은 “시신 신원 확인은 물론이고 어느 병원에 있는지조차 확인이 안 된다”며 울먹였다. 유가족 센터에서는 “사망자 상당수가 화상으로 숨진 터라 당장 사망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경찰은 현장 감식을 통해 화재 원인을 규명하고 공사 현장 관계자들을 상대로 안전조치 이행 여부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통풍이나 환기 상태가 충분하지 않고 가연물이 있는 건축물 내부에서 불꽃 작업을 할 경우 소화기구를 비치하고 불티 비산 방지 덮개나 용접 방화포 등으로 불티가 튀는 것을 막는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류창고 공사현장

물류창고 공사현장

물류센터 시공사인 (주)건우 관계자는 “가슴 아픈 일이 생겨 시공사로서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사고를 잘 수습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현장에는 안전관리자가 상주해 있었다”고 말했다. 종합물류기업인 한익스프레스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누나인 김영혜씨가 최대 주주다. 이석환 대표이사는 김씨의 아들이다.
 
이천에서는 2008년에도 40명이 사망한 냉동창고 화재 사고가 발생했었다. 2018년에는 밀양 세종병원에서 불이 나 48명이 사망했고, 2017년에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로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문 대통령 긴급회의 “사고 반복 유감”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후 노영민 비서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을 관저로 불러 긴급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실종자가 나오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철저히 수색해 주기 바란다. 필요하면 유전자 감식 인원을 늘려서라도 사망자 신원 확인을 최대한 서둘러 유족들이 시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부상자 의료 지원, 사망자·부상자 가족 현장 지원 등도 지시했다고 강민석 대변인이 전했다.
 
문 대통령은 “유사한 사고가 반복돼 유감스럽다. 과거의 사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라고도 말했다. 정세균 국무총리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은 사고 현장을 찾아 구조 및 지원 대책을 논의했다.
 
이천=김기환·최모란·권혜림·정진호·이우림·이가람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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