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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코로나가 권력을 좌측으로 밀었다

중앙일보 2020.04.27 00:43 종합 35면 지면보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권력의 판도가 바뀌었다. 보수의 참패, 진보의 압승. 역대 총선에서 이런 구도는 처음이다. 견제와 심판의 집중포화를 맞은 쪽은 야당이었다. 보수의 빈약한 공적(功績)은 표심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불안했다. 보수 중진이 검증도 안 된 정치신인들에게 줄줄이 낙마한 것은 ‘묻고 더불로’ 가자는 유권자의 미래 투표였다. 태극기집회의 열혈당원이었던 70대 어느 유권자는 SNS에 이렇게 썼다. ‘이제야 내려놓네. 우리 가치관과 우리가 주역이었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네. 말없이 떠나갈 때!’
 

코로나로 드러난 세계화의 허상
공공의료와 안전망 이미 망가져
한국의 협업체계 각광받을 전망
탈세계화로 진짜 좌파 시대 열려

정치스타가 나와도 권력이동을 막을 수 없다. 민주화 30년 동안 한국의 정치권력은 좌측으로 꾸준하고 느리게 이동해 이제 대세를 굳혔다고 생각한다. 좌파가 잘해서가 아니다. 최종적 동력은 세계화의 누적된 모순에서 나왔다. 미국과 구소련이 1989년 몰타섬에서 선언한 ‘신질서’, 그 후 전세계가 동참했던 세계화 행진의 화려한 구호는 이제 누더기가 됐다. 부국과 빈국의 동반성장과 번영의 약속을 불평등과 양극화가 채웠다. 젊은 세대는 취업전쟁을 치르고, 기성세대도 조기퇴직과 노후 불안정에 전전긍긍했다. 세계화 주도그룹이 ‘4차 산업혁명’이란 대형 크루즈선을 띄웠지만, 생애 설계는 불가능해졌고 모두가 리스크를 안고 살았다. 세계화의 덫, 그 한계가 목까지 차오르던 중이었다.
 
세계화의 치부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날지 아무도 몰랐다. 많은 것들이 이미 망가져 있었다. 공공의료 선도국들이 코로나에 쩔쩔 매는 장면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민영 의료보험으로 악명높은 미국은 차치하고라도 전국민 건강서비스(NHS)를 자랑하던 영국, 스웨덴, 프랑스가 병상, 의료장비, 의료진 부족에 악몽을 겪는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거리에 넘쳤다. 하루 평균 5명꼴만 진료하던 그들의 관행은 하루 100여명을 너끈히 돌봤던 한국 의사들의 실력을 따라잡지 못했다. 민간 병의원이 골목마다 지키는 한국과는 달리 중질환 진료대기자가 갈수록 늘었던 게 그들의 현실이었다. 한국이 갈 길이 아님을 일찍 알았다.
 
세계화가 그토록 강조했던 안전망(safety nets)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미국 백인 중산층이 구호점심을 기다리는 딱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기업파산과 조업중단으로 실직자가 쏟아졌다. 미국 실직자들은 파산 외에 방법이 없고, 중국은 귀촌으로 숨통을 튼다. 유럽은 1980년대 사민주의 전성기 매뉴얼을 꺼내들 것이다. 개도국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용 노동에 가족 생계가 달린 빈곤층의 필살기는 무용지물이 됐다. 코로나에 쓰러진 난민들은 국제 구호단체의 손길을 기다릴 뿐이다.
 
코로나 기습으로 글로벌 네트워크가 거의 망가졌다. 우리도 마스크 대란을 겪었지만 선진국의 생필품 대란(大亂)은 부끄러운 현실이었다. 휴지사재기, 달걀, 우유, 의약품 사재기라니? 부국에서 치즈와 식빵난(亂)으로 폭동이 일어난다면 어디 믿겠는가? 글로벌 분업과 해외의존 100%가 낳은 허망한 결과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가 일본 도요타를 타도할 호기(好機)를 놓치지 말자고 결의했는데 빈말이 아니다. 일본 자동차기업들은 부품은 해외조달, 완성차는 국내 조립하는 이원구조다. 부품 사슬이 끊기면 생산라인은 중단된다. 현대자동차는 ‘함대형 선단(船團)생산체계’를 구사해서 완성차 공장과 수십 개 협력업체가 동반 진출한다. 코로나 역경에도 불구하고 현대차 가동률이 세계 최고(64.7%)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닛산과 혼다는 30%대, 벤츠와 GM은 10%대로 내려앉은 상태다. 반도체? 반도체 협업 생태계는 국내에 집적돼 있다.
 
한국은 선진국! 난생처음 개도국 열등감에서 벗어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진단키트! 씨젠을 비롯, 여러 바이오벤처가 코로나 팬데믹을 미리 읽었고 사운을 건 생산 전환에 돌입했다. 한국은 생필품 생산은 물론 제조업 포트포리오를 가장 적정비율로 발전시킨 나라였다. 세계 최고 수준인 정보통신과 모바일 산업은 코로나가 닿지 않는 언택트(untact) 문명을 주도할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
 
정책능력 제로로 비난받던 정부의 코로나 대응 조치는 기대 이상이었다. 재난구제금, 세금·공과금 감면, 긴급 대출은 부족하나마 실직자, 빈곤층과 자영업자에겐 단비가 될 것이다. 산업금융과 대기업 자금지원에 이익공유와 일자리유지 조건을 단 것은 현 정권이 초심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세계 국가들은 ‘탈세계화’ 내지 ‘적정 세계화’로 유턴할 채비를 차릴 것이다. 큰 정부와 좌파정권에 기회의 창이 열렸다. 여기에 ‘한국형 좌파모델’이 화답하기를 기대한다. 의료, 안전에 민간-공공의 적정 믹스(mix), 시장경제와 생계·소득 보장의 적정 혼합, 고용체계의 유연 안정성이 관건이다. 세계가 거론하는 ‘한국형 방역’은 민공(民公)합작이었다. 지난 3년, 정치조작과 적폐청산 같은 낡은 메뉴 말고 ‘생애리스크 방역’에 정관민(政官民) 협치 코러스로 실력을 보여 달라. 진짜 좌파시대가 열렸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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