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부 약속 일절 안잡은 김정렴 "靑명함 뿌리고 다니지 말라"

중앙일보 2020.04.26 17:11
“박정희 정부 경제 정책의 중심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개별연대 당시 고속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본인을 앞세우는 걸 꺼렸고 경제 정책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조정자 역할에 충실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이 25일 별세했다. 유가족이 26일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지키고 있다. 변선구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이 25일 별세했다. 유가족이 26일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지키고 있다. 변선구 기자

 
25일 별세한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에 대해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강 전 부총리는 “ (김 회장이) 대통령 비서실장 재직 시절에 외부 인사와의 약속도 일절 잡지 않았던 거로 기억난다”며 “대신 온화하고 원만한 성품으로 경제 관료들이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도록 지원했다”고 전했다. 김 회장이 비서실장일 때 강 전 부총리는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물가정책국장,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기획차관보 등을 지냈다.  
 
‘최장수 비서실장(69년 10월~78년 12월)’으로 잘 알려진 김 회장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한국 경제 고도성장의 토대를 쌓은 인물로 꼽힌다. 김 회장은 박정희 정부 당시 경제부처 장관과 '경제통' 비서실장을 지내며 수출 주도형 성장, 중화학공업 부흥 등을 이끌었다. 
 

화폐개혁 주도, 한은의 '현대화'기여 

김 회장은 44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입행했다가 강제 징집돼 잠시 군인의 길을 걸었다. 52년 준위로 예편한 뒤에는 한은 조사부 차장, 재무부(현 기재부) 이재국장 등을 맡았다. 그러면서 한은이 ‘현대 중앙은행’의 모습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 53년과 62년 단행된 1‧2차 화폐개혁을 입안하는 역할도 했다. 
 
66년 재무부 장관, 67년 상공부 장관을 맡으며 수출 주도, 공업 고도화 정책을 주도한 김 회장은 69년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의 길을 걸었다. 당시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른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니다”라는 김 회장에게 박 대통령은 “나는 경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경제 문제는 비서실장이 잘 챙겨달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개관식이 열린 2012년 2월21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는 김 회장. [중앙포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개관식이 열린 2012년 2월21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는 김 회장. [중앙포토]

'탁월한 조정자'…막힌 정책은 말끔히 뚫어주기도

박 전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측근으로 김 회장은 당시 한국 경제의 '설계자' 역할을 했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대통령이 큰 그림을 그렸지만, 중화학공업 중심의 성장은 김 회장이 설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김 회장은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다. 김 회장은 회고록『아, 박정희』를 통해 “청와대 비서실을 구성하는 수석비서관·비서관·행정관은 대통령의 그림자처럼 행동해야 하고, 대통령이란 큰 나무의 그늘에서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일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비서실 직원이 명함을 외부에 뿌리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는 청와대 로고가 새겨진 봉투를 외부에 갖고 나가지 못 하게 했다고 한다.

 
대신 정책 입안 과정에서 각 부처 혹은 이해 당사자 간 갈등이 빚어질 때 탁월한 경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했다는 게 후배 공무원들의 평가다.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김 회장은 ‘비서는 자기 목소리를 직접 밖으로 내면 안 된다’고 늘 강조했다”며 “대신 경제 정책 결정 과정에서 드러나는 부처 간 이해 상충 및 대립 문제를 항상 합리적으로 조정·조율했다”고 말했다. 그는 “장관들이나 은행장들이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을 때는 항상 김 회장을 찾아갔고, 김 회장은 이를 말끔하게 해결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1953년 12월 1일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소식. 민간 부문 최초의 탈(脫)아시아 사무소였다. 유창순 사무소장(왼쪽에서 둘째), 아메리칸대학교 연수생 신병현(훗날 총재, 가운데 뒤), 뉴욕 연준 연수생 김정렴(훗날 재무장관, 맨 왼쪽) 등이 참석해 축하했다. 사진 한국은행

1953년 12월 1일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소식. 민간 부문 최초의 탈(脫)아시아 사무소였다. 유창순 사무소장(왼쪽에서 둘째), 아메리칸대학교 연수생 신병현(훗날 총재, 가운데 뒤), 뉴욕 연준 연수생 김정렴(훗날 재무장관, 맨 왼쪽) 등이 참석해 축하했다. 사진 한국은행

한국 경제의 설계자였지만, 몸을 낮춘 조정자로 일한 김 회장으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산업고도화 정책을 빠르게 추진할 수 있었다. 농업개발, 산림녹화, 새마을운동, 의료보장제도 등 한국 사회 전체가 도약하는데 큰 역할을 한 주요 정책들도 이 무렵에 기틀을 갖췄다.  
 

김 회장이 경제 관료로, 비서실장으로 경제 정책을 이끄는 동안 한국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53년 67달러에 불과하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박정희 정부 마지막 해인 79년 1510달러로 껑충 뛰었다. 윤 전 장관은 "김 회장은 한국 경제 산업화의 숨은 조력자이자 최대 공로자로 많은 후배 공직자들의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하남현·임성빈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