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회장은 1944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제에 강제 징집돼 히로시마(廣島)에서 근무하는 바람에 원폭 투하로 인한 후유증을 앓았지만, '청년 김정렴'은 한은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한은이 아시아권 밖에서 처음으로 낸 해외 사무소 개설에도 힘을 보탰다. 53년 한은 뉴욕 사무소를 낼 때 그는 뉴욕 연방준비은행 연수생이었다. 귀국 후에는 한은 핵심 부서였던 조사부에서 일했다.
![1953년 12월 1일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소식에서 유창순 사무소장(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 연수생 김정렴(왼쪽 끝). 한은 뉴욕사무소는 민간 부문 최초의 탈(脫)아시아 사무소였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caf5567a-8e55-4ce2-b025-bacd519dedac.jpg)
1953년 12월 1일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소식에서 유창순 사무소장(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 연수생 김정렴(왼쪽 끝). 한은 뉴욕사무소는 민간 부문 최초의 탈(脫)아시아 사무소였다. [중앙포토]
![금융·통화 정책 관련 엘리트들이 모여있던 1950년대 중후반 한국은행 조사부. 훗날 한은 총재를 지낸 신병현 부장(왼쪽 둘째), 송인상 당시 부총재(넷째), 김정렴 당시 기획조사과장(오른쪽 끝).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8365c805-ff16-419a-b7d3-88505706a195.jpg)
금융·통화 정책 관련 엘리트들이 모여있던 1950년대 중후반 한국은행 조사부. 훗날 한은 총재를 지낸 신병현 부장(왼쪽 둘째), 송인상 당시 부총재(넷째), 김정렴 당시 기획조사과장(오른쪽 끝). [중앙포토]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62년)의 실무를 총괄한 그는 이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재무부 차관을 시작으로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맡아 산업화를 이끌었다. 한국 테크노크라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두터웠다. 66년 9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당시 내각이 총사퇴를 결의했는데, 김 회장은 이듬해 상공부 장관으로 재발탁됐다.
![재무부 장관이던 1966년 6월 대정부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 김 회장은 같은 해 9월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김두한 전 의원이 국회에서 오물을 투적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이 자리에 있었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4250de4f-ac18-446f-88bc-dfdb716d495a.jpg)
재무부 장관이던 1966년 6월 대정부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 김 회장은 같은 해 9월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김두한 전 의원이 국회에서 오물을 투적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이 자리에 있었다. [중앙포토]
![1968년 한미상공장관회의에서 모리스 스탠스 미 상무장관과 악수하는 당시 김정렴 상공부 장관[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13c04860-3899-4eda-a101-69a76d114705.jpg)
1968년 한미상공장관회의에서 모리스 스탠스 미 상무장관과 악수하는 당시 김정렴 상공부 장관[중앙포토]
역대 최장수 청와대 비서실장(1969년 10월~78년 12월)을 지낸 그에게는 '박 전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뒤따르고 있다. 고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김 회장을 두고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차지철과 김재규가 비서실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원로들은 지금도 "김 회장이 청와대에 계속 있었다면 10·26 사태는 없었을 수도 있었다"며 안타까워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으로 인해 박 대통령이 숨진 10·26 사태는 김 회장이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고 10개월 후에 일어났다.
![1969년 10월 21일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고 있는 김정렴 회장.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8696bd15-fbbd-40f7-a3f0-bba83f7cfe1d.jpg)
1969년 10월 21일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고 있는 김정렴 회장. [중앙포토]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후 김 회장은 1979년 주일 대사를 맡아 청와대를 떠났다. 주일 대사로 부임하기 전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찍은 기념사진.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df5a5513-84d7-4cc9-be3c-5bd278ad5b3e.jpg)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후 김 회장은 1979년 주일 대사를 맡아 청와대를 떠났다. 주일 대사로 부임하기 전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찍은 기념사진. [중앙포토]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은 계속됐다.『아, 박정희』라는 정치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했고, 기념관 설립 등을 주도했다. 아들인 김준경씨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지내며 대를 이어 한국 경제에 기여했다.
![중앙M&B에서 출간한 『김정렴 정치 회고록-아, 박정희』.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06ba6185-6665-4189-8031-44856b05298d.jpg)
중앙M&B에서 출간한 『김정렴 정치 회고록-아, 박정희』. [중앙포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개관식이 열린 2012년 2월21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는 김 회장.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f1c70f89-0162-4ecc-93c2-3c313abb62c9.jpg)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개관식이 열린 2012년 2월21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는 김 회장. [중앙포토]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는 김정렴 회장.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4/26/3ece85ed-1249-4cf9-a20a-1eb6b40716c9.jpg)
서울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는 김정렴 회장. [중앙포토]
임성빈·하준호 기자 im.soungbin@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