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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보지 말고 ‘시각적 촉감’을 느껴라

중앙선데이 2020.04.25 00:20 683호 19면 지면보기
최상철의 ‘無物13-9’(2013), 97ㄹx145.5㎝. [사진 박여숙화랑]

최상철의 ‘無物13-9’(2013), 97ㄹx145.5㎝. [사진 박여숙화랑]

‘단색화’는 2010년대 들어 한국 미술시장의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비엔날레에서, 아트페어에서 ‘단색화’는 곧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말로 여겨지기도 했다. 서양 미술사조의 ‘모노크롬 페인팅(Monochrome painting)’과 일견 유사성을 갖고 있지만, 그와 다르다는 의미에서 영문 표기도 별도로(Dansaekhwa) 했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모노크롬 회화가 500년간의 선형적 전개과정을 거쳐 마지막에 도달한 ‘텅 빈 회화’라면, 한국의 단색화는 평면에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고유의 정신성을 담고 있다”며 그 차이를 말한다.
 

박여숙화랑 ‘텅 빈 충만’전
‘단색화’를 넘어 ‘단색조 회화’로
1세대부터 3세대까지 균형 배치
한국 미술의 새로운 방향성 추구

그러나 한국의 ‘단색화’가 과연 어떤 미술사조인지, 국내 미술계 안에서 명확히 정리된 바는 아직 없다. 용어부터 그렇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정준모는 “모노크롬 페인팅의 번역어인 ‘단색화’를 아무 저항 없이 사용해 ‘색’이라는 단어에 갇혀버렸다”고 지적한다. 1970년대 중반 국내에서 시작된 이 일군의 무채색계열 추상화에 대해 정 평론가는 “색뿐 아니라 그림의 ‘내용’과 ‘형성되는 과정’이 더 중요한 만큼 이를 두루 아우를 수 있는 ‘단색조 회화’라고 부르자”고 주장한다.
 
김태호의 ‘Internal Rhythm 2019-13’(2019), 163x131.5㎝. [사진 박여숙화랑]

김태호의 ‘Internal Rhythm 2019-13’(2019), 163x131.5㎝. [사진 박여숙화랑]

정 평론가가 큐레이터로 참가해 지난 10일 전시를 시작한 ‘텅 빈 충만’(5월 10일까지 박여숙화랑)은 ‘단색조 회화’ 1세대부터 3세대까지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2014년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독일 베를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브라질 상파울루, 홍콩,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란 테헤란, 베트남 하노이를 돌고 돌아온 기나긴 순회전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의 귀국 보고회이기도 하다. 대형 갤러리들에 의해 집중부각된 고 정창섭·윤형근 화백과 김창열·박서보·정상화 등의 스타 작가는 물론 이들의 뒤를 잇는 중진 및 젊은 작가들까지 총 18명을 고루 배치하고, 도자기와 사진까지 더해 구성을 입체적으로 했다는 점이 이 전시의 미덕이다.
 
전시장 한복판에는 권대섭의 유백색 달항아리가 영험한 아우라를 뽐내고 앉아있는데, “물질을 정신세계로 승화시켜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단색조 회화’의 중성적 논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정 평론가의 설명이다. 부제가 ‘한국미술의 물성과 정신성’인 이유다. 그는 특히 한국 단색조 회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시각적 촉감’을 꼽았다. 안료의 물성에 의해 드러나는 화면의 질감을 눈으로 보고 느낌으로써 화면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권대섭의 ‘달항아리 백자호02’(2019), 51.4x59㎝. [사진 박여숙화랑]

권대섭의 ‘달항아리 백자호02’(2019), 51.4x59㎝. [사진 박여숙화랑]

그래서 색을 쌓고 긁어내고 다시 쌓았다가 다시 긁어내는 김태호, 흰색을 20~30회 칠하고 또 칠하는 김근태, 캔버스 위에 숯을 붙인 뒤 그 위에 한지를 덮고 쇠솔로 문지르기를 반복하는 이진우, 패널에 옻칠하기와 사포질하기를 되풀이하는 김덕한, 광목천에 섬유강화수지를 발라 딱딱하게 만든 ‘ㄷ’자를 상하좌우로 증식시키는 남춘모의 작업에서는 작가의 노력이 어떻게 퇴적됐는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정교하고 약한 샤프심으로 심오한 깊이를 만드는 윤상렬, 물감이 묻은 돌을 화면에 무수히 굴려 형상을 얻어내는 최상철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박여숙 대표는 “서구의 미니멀 아트가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작업하는 ‘결과의 예술’이고 일본의 ‘모노하(物派)’가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하는 ‘관계의 예술’이라면, 한국의 ‘단색조 회화’는 끊임없이 반복해 작업하는 ‘과정의 예술’”이라며 “이번 전시가 새로운 담론을 도출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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