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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 노약자가 죽으면 경제에 도움?…코로나19의 역설

중앙선데이 2020.04.25 00:20 683호 27면 지면보기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그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김염증(코로나19)으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하고 있던 네이버 열린연단의 강연회가 지난 12일에 열렸다. 그 중 하나는 명지대 김두얼 교수의 ‘재난과 경제 성장’이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다. 강연은 인류 역사에 일어난 기근, 질병, 천재(天災), 전쟁 등의 재난 사례들에 언급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움직이는 여러 원인들의 상호 관계를 생각하게 하였다. 여기의 글은 김교수의 글을 압축하여 소개하면서, 거기에 약간의 해석을 덧붙이는 것이 될 것이다.
 

경제 부담 덜자고 감염 방치 못해
재난에 대한 의학적 관점의 대응은
경제 관점의 대응과 모순될 수도

혁명 뒤 쿠바는 동포 송금에 의존
이상 실천할 정치적 결단 내릴 땐
사려 깊은 생각, 근거가 뒤따라야

그런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강연에 뒤따르는 토론의 한 부분은 불가피하게, 코로나19와 경제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을 논하면서 드러나는 한 가지 사안은 역병 또는 다른 재난에 대응하면서, 그에 대한 의학의 관점에서의 대응과 경제적 관점에서의 대응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모순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하나의 작은 예를 들어 코로나19에서 많은 사망자가 생긴다면, 그리고 그 사망자 수 가운데 다수가 노약자가 된다면, 그것은 경제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경제를 돕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노인의 감염을 방치할 수 있는가? 이것은 조금 우습다면 우스운 물음이지만, 다른 많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기에 대한 항의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자가격리 조치에 항의하는 경우들이 생기는 것을 본다. 감염 가능성을 생각해서 격리 조치를 하고, 그 조치가 오래되면, 사람들은 답답하여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인권을 제한하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리하여 격리에 반대하는 명분으로도  등장하기도 한다. (인권의 전통에 오래 익숙해진 서구에서 더욱 그렇다.)
  
대책 마련 때 사전·사후 효율성 딜레마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가격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다 같이 사람들의 협동 작업을 요구하는 산업 활동을 크게 제한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쪽이나 그렇지만, 이 후자도 결국은 삶의 필요 조건에 해당된다. 더 넓게 볼 때, 경제는 개인의 자유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하나의 중대한 조건이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서구어에서 경제라는 말의 원어가 된 오이코노미아(oikonomia)도 집안 사람을 다스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 말을 번역하는 말 경제(經濟)도 비슷한 뜻을 가진 경제제민(經世濟民)이라는 성어(成語)에서 왔다고 한다. 다만 이 사자 성어는 조금 더 넓게 세계와 백성의 삶을 다스리고 돌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작게 크게 그리고 긴 시간의 관점에서 사람의 삶을 돌보는 경제와, 적어도 현장에서는, 개인의 삶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의학-그리하여 인간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저울질하는 일-이 둘 사이에 갈등과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는 삶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와 관련하여, 김두얼 교수의 강연에서 제기된 질문 하나는, 현재의 역병만 아니라 그와 비슷한 재난들을 예방할 수 있는 안전 조치 기구를 국가에서 설립할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이 국가적 낭비로 간주되고 또 그러한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효율적인 경제 운영의 문제이지만, 그 효율이 참으로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고려한 것이라 할 것이었다. 안전 기구도 삶의 안전을 위하여 설립하는 것이겠지만, 거기에 들어갈 경비를 절약하는 것은 또 하나의 경세제민을 염두에 두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 중심을 두고 대책을 마련하든지 간에 모든 문제점들을 완전히 예측하면서 대책을 마련할 수는 없다. 김두얼 교수는 대책을 마련하는 데에는 두 가지 다른 관점이 있다고 말하였다. 하나는 재난을 예상하면서 사전에 생각하는 것, ‘사전효율성(ex ante efficiency)’이고 다른 하나는 ‘사후효율성(ex post efficiency)’이다. 전자는, 재난을 포함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철저하게 예상하여 정책을 고안하고 수행할 때, 후자는 일이 일어나거나 일단 이루어진 다음에 철저하게 교정 작업을 수행할 때의 효율의 기준이다. 그러나 그러한 효율의 기준에 대한 기준, 상위 기준이 확실한 것일 수는 없다. 그리하여 이것을 보완하는 말은, 되풀이가 되겠지만, 대책의 궁리는 철저하고 넓고 깊어야 한다는 말일 뿐이다. 다시 말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는 일이, 물론 과학적으로 그리고 인간주의적으로 수고하는 일이 가능할 뿐이다. 그것을 위하여서는 물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하고, 그에 더하여, 사실과 이성에 대한 존중이 사회적 언술의 문화에 수렴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정치 권력이 결정하는 정책은 완전한 현실 시나리오를 실행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일단의 과감한 모험의 성격을 띠기 쉽다. 이번 강연에서 이야기 된 바, 재난이 가질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을 들어본다. 그것은 미국의 보스턴에서 1872년에 일어났던 화재이다. 그것은 시의 중심부를 완전히 타 없어지게 한 대화재였다. 그런데 시가지가 복구된 다음에 드러나게 된 화재의 효과의 하나는 시의 중심부가 보다 정연한 도로망과 뛰어난 설계에 입각한 건물들로 이루어진 시가지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정치적 결정은 이러한 결과를 성취하기를 예상하는 단호한 결정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여가 전체에 대한 비전과 그 결과로서 어떤 유토피아를 설정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른 것일 때 그렇다. 다만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그 목적의 달성에 성공한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물질적 재구성은 가능할 수 있으나, 표현이야 어찌 되었든, 물질적 원리 또는 물질주의 원리가 아니라 정치 기술과 문화를 그렇게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소련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 체제의 흥망에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달리 보면, 사람의 삶은 거창한 관념의 시나리오 속에 집약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그 자체의 시나리오, 삶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고, 그 시나리오는 그러한 관념의 테두리를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삶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파악해보자 하는 입장은, 이데올로기적이든 아니든 그것도 인성(人性)의 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정답을 찾기 어려운 난제(難題)가 된다.
 
얼마 전 한 외지(外紙)에, 근간의 쿠바의 소설들에 대한 서평과 함께 쿠바와 정치와 이념의 현재를 기술하는 글이 실렸었다. 그 글에 따르면, 쿠바에 거주하는 쿠바인에게나 쿠바로부터 망명하여, 미국이나 남아메리카 여러 지방에 살게 된 쿠바인에게 1953년에서 1958년까지의 혁명전쟁,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 형제,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같은 지도자들에 대한 신화는 대체로 남아 있으나, 그것을 신화가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체로 ‘종신직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그들의 일상 생활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데 불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혁명이 확립한 배급 제도로 지탱되는 일상적 삶, 교육 보장 제도의 낮은 수준 등이 보통 사람들의 문제인 것이다. 미국을 포함하여, 해외 이민자들과 교류가 허가된 후에 쿠바인들이 크게 의존하는 재원의 하나는 해외 형제와 동포들이 보내오는 보조금이라고 한다. 이것은 ‘뉴욕 오브 북스’ 4월 9일자에 실린, 미국 거주의 쿠바인 작가 코코 푸스코의 쿠바 사회 스케치를 다시 줄여 본 것인데, 그 제목은 ‘폐허에서의 사랑’이다. 폐허란 오늘날의 쿠바 사회를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겠지만, 그 사회는 사랑으로 대하게 되는 사회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이 무너뜨린 것은 부패한 풀헨치오 바티스타 대통령과 부패한 쿠바 사회다. 그러나 혁명은 경제성장을 이루어 내지 못했다. ‘사랑’은 이러한 과정과 과정의 결과를 다 포함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치와 사회가 폐허가 된 것은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주어진 순간에 스며있는 로고스 확인해야
 
적어도 푸스코 작가가 시사하는 쿠바 혁명의 역전(逆轉)과 모순은, 혁명 뿐만 아니라 다른 큰 규모의 정치적 결단에도 따르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민중이 갈망하는 것의 하나는 일상적 삶의 고통이나 권태를 벗어나게 해줄 이상이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이다. 그러니 만큼 삶의 의미를 드높여줄 이상을 정치적 결단으로 옮기는 데에는 철저하고 넓고 깊은 생각이 수반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것은 사전의 효율 그리고 사후의 효율을 보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단호한 결단의 순간이 없을 수가 없다. 그 결단은 과대망상이 아니라 정당한 근거, 적당한 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기독교의 전통에 들어 있는 개념이지만, ‘카이로스’는 이러한 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는 영원이 시간에 드러나는 것을 말하지만, 모든 좋은 순간은 이것을 포함한다.
 
20세기 영국의 시인 W. H. 오든은 ‘카이로스와 로고스’라는 제목의 시를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우리 삶의 꽃들은 혼란 없이 모든 침묵과 모든 공간을 넘어 기회를 이끌어 줄 것이다.” 주어진 삶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 말씀, 세상의 이치를 그대로 구현하는 순간, 즉 카이로스이면서 로고스를 구현할 것이다. 주어진 순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의 참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순간에 스며있는 로고스를 확인하는 것이다. 오든의 말은 이러한 뜻으로 해석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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