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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논설위원이 간다] 평등 인권 가르치는 성교육이 n번방 막는다

중앙일보 2020.04.23 00:34 종합 23면 지면보기

n번방 한달

n번방 사건은 다수의 10대 가해자들로 충격을 더했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4·왼쪽)과 공범 강훈(18)은 신상이 공개됐다. [중앙포토]

n번방 사건은 다수의 10대 가해자들로 충격을 더했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4·왼쪽)과 공범 강훈(18)은 신상이 공개됐다. [중앙포토]

텔레그램 박사방 조주빈(24)의 검거와 신상공개로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한 달이 지났다. ‘노예’로 지칭된 미성년자 피해자가 다수 포함된 반인륜적인 디지털 성범죄에 공분이 일었다. n번방 사태가 공론화되기까지는 SNS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디지털성범죄아웃(DSO)’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 ‘대학생 취재팀-추적단 불꽃’ 등 젊은 여성들의 힘이 컸다. 수사 관행과 법 제도가 뒤처진 공권력의 공백 속에서 실태를 고발하고 여론을 만들었다. 사법당국과 정치권은 엄정 수사와 처벌, 법제 정비를 약속한 상황. 과연 이번에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만연한 인터넷 여성혐오
n번방 10대 가해자 양산
처벌 강화만이 능사 아니고
성문화 개선, 교육 필수적

디지털 기술 만난 성폭력의 변주
 
이번 사건의 특이점은 조주빈의 공범으로 체포된 ‘부따’ 강훈(18) , 또 다른 핵심 가해자 ‘태평양’(16) 등 10대 피의자가 다수라는 점이다. 강훈은 미성년자로는 최초로 신상이 공개됐다. 게임 메신저 디스코드에서 성착취물 채널을 운영·유포해 지난 7일 검거된 남성 10명도 대부분 미성년자였다. 운영자 중 한명은 범행 당시 12세 초등학생이었다. 이를 두고 방송인 김어준은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범죄가 10대, 20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가 본질을 흐리는 막말로 비판받았다. 그저 ‘무서운 요즘 10대’의 일탈이 아니라 ‘소라넷’(1999~2016)으로부터 웹하드 카르텔 등을 거쳐 수년간 지속된 성착취 범죄가 디지털 기술을 만나 잔혹성을 더한 게 n번방이기 때문이다.
 
김애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성폭력이 돈이 되면서, 전에 없던 일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성폭력 문화가 새로운 기술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장은 “디지털 플랫폼 이용이나 콘텐츠 제작능력이 뛰어난 10대들을 성인 범죄자들이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10대 소년들이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여성을 거래해도 되고 성적 도구로 삼아도 된다는 식의 왜곡된 성 인식을 전수받고, 여성을 짓밟아도 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이분화하며 여성혐오를 내재화하는 게 이런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베’류의 여성혐오가 ‘선택 아닌 디폴트’로 만연된 결과라는 지적이다.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처벌 강화만으로는 부족하고 성 문화 전반의 개선, 교육 등이 시급한 이유다.
 
일단 수사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16일까지 텔레그램 등을 이용한 디지털 성범죄로 검거된 사람은 309명이고 조주빈 등 43명이 구속됐다. 추가 범죄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일에는 아동 성착취물을 공유해온 11개의 n번방이 추가 적발됐고, 박사방 조주빈 수법을 따라 해 3500만원을 챙긴 고교생 5명 적발(22일)도 이어졌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24)의 범죄인 인도(미국) 절차도 진행 중이다. 1년 6개월형을 받아 27일 출소 예정인 그는 국내 아동 성착취 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의 대표사례로 꼽히던 인물이다. 그 외 여야가 앞다퉈 발의한 n번방 재발 방지 법안의 빠른 통과도 과제다. 생산·유통·소비가 구분되지 않는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단순 관전자·이용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비신체적 성폭력을 어떻게 중범죄화할 것인지 등이 향후 법적인 논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10대 범죄의 잔혹성이 알려지면서 소년법 폐지·개정 논의도 불붙고 있다. 그러나 처벌 강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최영희 전 국가청소년위원장은 “엄중 처벌이라는 원칙은 지키되 언젠가 사회에 돌아갈 10대 가해자의 경우에는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책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의 저자 최승범 교사는 “10대가 성인들의 여성혐오 문화,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성혐오 정서를 그대로 배우고 있다”며 “초등학생 때부터 성 평등·인권 교육을 해야 한다. 몇몇 교사의 노력이 아니라 교육부 차원의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상황은 지금보다도 나빠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고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는 한 학부모도 “내 아들과는 먼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위기감이 필요해 보인다”고 털어놨다.
  
피해예방만 가르치는 성교육 표준안
 
n번방 사태 이후 각 청소년 성교육 단체로는 개별 교육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코로나19때문에 대면 교육에는 제동이 걸렸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대상의 디지털 성교육 문의도 많다. 교육 현장에서는 교육부가 2015년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이 있지만 권고사항(1년에 15차시)이라, 동영상 하나 틀어주면 끝인 곳도 많다. 표준안 자체도 ‘여자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유난히 조건이 좋은 알바는 하지 말고, 이성 친구와는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성폭력을 예방하는 방법’ 등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피해자에게 성폭력의 책임을 묻는 등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이 거세다. 교육부는 n번방 이후 범정부 TF를 꾸려 대책을 논의하면서도 성교육 주무 담당자들을 참여시키지 않아 빈축을 샀다. 그나마 여학생에게 피해자 되지 않기만을 강조하는 현 교육안의 재검토 대신 성폭력 예방 교육만 일부 손질하는 수준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영희 전 국가청소년위원장은 “폭력피해 예방을 넘어 평등과 인권, 시민교육의 일환으로 성교육이 시급하다”며 “젊은 여성 시민들이 n번방을 공론화했고, 이제는 학부모들의 큰 관심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2018년 유네스코도 “인권과 평등, 건강과 복지에 기반한 포괄적 성교육 (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을 새로운 성교육 지침으로 개정 발표했다.
 
미투 초기이던 지난 2018년 1월 ‘초·중·고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국민청원에 21만명이 동의했지만, ‘인권·평등교육=성교육’에 대한 반동성애 진영의 공격, 페미니즘 모임 교사들에 대한 신상털기 등 반발 움직임도 만만치는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성매매와 포르노그래피가 용인되는 남성중심사회가 어떻게 성착취·성범죄로 연결되는지, 이런 문화나 범죄에 가담했을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 또 묵인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성범죄 판치는데 아직도 국영수만 중요한가”
이현숙 소장

이현숙 소장

“믿기지 않겠지만 지방에 가면 아직도 난자, 정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있어요, 학교장이나 담당교사(보건교사)가 의지를 가진 학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죠. 전국 57개 청소년성문화센터 교육 프로그램도 있지만 공교육 안으로 성교육이 들어와야 합니다. 수업시간 문제 등 논의가 필요하지만 성교육이 국·영·수보다 중요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이현숙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장은 성교육의 핵심은 ‘관계맺기’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남자아이들이 어떨 때 키스해도 되느냐고 물어요. 데이트 문화를 배우는 게 TV 등 대중매체인데, 여기서 보여주는 이미지가 ‘남자가 주도하고 여자는 따라오는’ 관계죠. 남녀가 성이라는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자기 욕망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서로 합의·조력하라고 가르칩니다. 언제 어디서 성행위를 할지, 데이트할 때 비용은 어떻게 할지 등등을 서로 합의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폭력의 싹을 자를 수 있죠. 여자가 성에 대해 말하는 게 조신하지 않다고 하는 남자친구라면 헤어지라고 해요. ‘(남자친구가) 키스할 때마다 물어봐서 고민’이라는 TV 드라마 여주인공의 대사가 있는데, 이런 게 왜곡된 성 인식을 퍼트리죠.”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정보의 폐해도 크다고 지적했다. “페미니즘이 싫다고 하길래 성 평등이 싫으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라고 해요. 커뮤니티에 떠도는 얘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거죠. 남학생들을 주로 통제하는 사람이 엄마, 여교사, 게임을 못하게 하는 여가부 등 여성이라는 것도 무분별한 적개심을 길러주는 것 같고, 여성은 약하니 배려하라고 배우는데 막상 주변 여자 친구는 힘도 세고 공부도 더 잘하니 ‘남자가 역차별당한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아요. 큰 틀의 불평등을 볼 수 있게 하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이 소장은 또 학부모와 자녀 간 디지털 이해도 격차가 크다며 성교육에는 “양육자 대상의 디지털 가이드라인 교육,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인터넷 안전교육 등이 포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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