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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역사적 개인’ 칸딘스키의 화려한 등장

중앙선데이 2020.04.18 00:20 682호 18면 지면보기

바우하우스 이야기 〈33〉

뮌헨의 ‘렌바흐 미술관’. 뮌헨의 보수적 역사주의 화가들의 리더였던 렌바흐의 저택을 뮌헨시가 사들여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사진 윤광준]

뮌헨의 ‘렌바흐 미술관’. 뮌헨의 보수적 역사주의 화가들의 리더였던 렌바흐의 저택을 뮌헨시가 사들여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사진 윤광준]

칸딘스키의 바우하우스 합류는 단순히 한 스타 화가의 영입에 그치지 않는다. 예술사에 기록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칸딘스키는 세기말 유럽의 모든 문화적 역량이 깔때기처럼 한 개인에게 축적되어 나타난 ‘역사적 개인’이었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철학적으로만 가능했던 ‘성찰적 메타인지’가 예술이라는 문화현상으로, 그리고 바우하우스라는 제도로 구체화되었다. ‘시각 중심 서구 문화의 상대화’라는 ‘메타인지의 제도화’는 내 ‘바우하우스 이야기’의 핵심이고, 긴 설명을 요하는 내용이다. 차후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를 위해 ‘퇴폐적 데카당스’로만 이해되는 ‘세기말(Fin De Siecle)’ 유럽의 문화적 상황에 관해 조금 더 자세한 입문적 설명이 필요하다.
 

뮌헨에 공부하러 온 칸딘스키
제체시온 리더 슈투크 제자 되기 원해
3년 못 기다리고 도중에 그만둬

추상회화라는 미술사 혁명 일으켜
렌바흐에 반기 든 유겐트슈틸도
칸딘스키 비하면 지루한 화풍 불과

‘역사적 개인’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봉준호 감독이나 방탄소년단의 활약은 뛰어난 각 개인들의 역량 때문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디지털시대의 문화적 역량, 특히 정보를 편집하는 에디톨로지적 역량이 한국사회의 봉준호 감독이나 방탄소년단에게 깔때기처럼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나는 ‘역사적 개인’이라 부른다. 사실 한국 남자, 또는 동양남자가 ‘매력적인 존재’로 서구 미디어에 비쳐지기 시작한 것은 문화심리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부산물’이다. 이제까지 서구 미디어에 비친 한국남자는 개를 잡아먹거나 가부장제에 취해 여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착취하는 ‘미개한 존재’였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도 ‘싸이’정도의 ‘웃기는 존재’였을 따름이다.
 
칸딘스키 바우하우스 합류는 역사적 사건  
 
렌바흐 미술관과는 대조적인 ‘빌라 슈투크 미술관’. 슈투크가 유겐트슈틸 양식으로 직접 디자인한 건물에는 그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윤광준]

렌바흐 미술관과는 대조적인 ‘빌라 슈투크 미술관’. 슈투크가 유겐트슈틸 양식으로 직접 디자인한 건물에는 그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윤광준]

근대사에서 독일은 유럽의 문제국가였다. 독일이 강해지면 전쟁이 일어났다. 1871년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가장 늦게 국민국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43년 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렸다. 1914년 시작된 전쟁에선 4년이 지나도록 지루한 참호전만 지속되었다. 전쟁은 누구의 승리라고 할 것도 없이 끝났다. 유럽에 남아있던 마지막 황제국가들인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오스만제국이 내부로부터 무너졌기 때문이다. 황제와 귀족들의 명분 없는 전쟁에 시민과 노동자들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1919년 6월, 전쟁의 책임을 묻고 그 배상내용을 결정하는 협정이 파리에서 체결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이다. 조약은 1871년 통일된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1세의 대관식이 열렸던 베르사이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체결되었다. 당시의 치욕을 되돌려주려는 프랑스의 복수였다.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독일에게 전가되었다.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반환하고, 군비축소와 식민지 상실은 물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휴전인 줄 알았는데, 얼떨결에 패전국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독일인들은 너무 억울했다. 이 억울함은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베르사유조약 이후 불과 20년 만인 1939년 8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또다시 엄청난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 같은 독일 근대사를 살펴보면, 1871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의 기간이 가장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도 독일은 당시 최강의 나라였던 영국을 압도하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보수적 예술아카데미에 저항한 제체시온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폭발적인 경제성장은 독일사회 곳곳에 변화를 가져왔다.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흥 부르주아들의 급성장에 따라 새로운 예술시장이 창출되어야 했다. 그들은 왕과 귀족들 취향의 역사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역사주의는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서사가 아니었다. 새로운 예술시장을 모색하는 다양한 실험들이 시도되었다. 젊은 예술가들은 왕과 귀족들을 고객으로 하는 보수적 예술 아카데미에 대항해서 자신들만의 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름도 ‘단절’과 ‘분리’를 뜻하는 ‘제체시온(Secession, 분리파)’이라고 붙였다. 가장 먼저 ‘뮌헨 제체시온’이 1892년에 결성되었다. 당시 뮌헨은 파리나 빈에 전혀 밀리지 않는 국제적 예술도시였다. 독일제국에 참여한 영방가운데 프로이센 왕국에 이어 둘째로 컸던 바이에른 왕국의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 섭정왕자(Luitpold Prinzregent von Bayern, 재위기간 1886~1912)가 펼친 특별한 문화정책 덕분에 수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뮌헨으로 몰려들었다.
 
바이에른 왕국의 지원을 독차지하며 뮌헨의 예술단체들을 이끌던 ‘화가들의 군주(Malerfürst)’ 프란츠 폰 렌바흐(Franz von Lenbach, 1836~1904)의 아성에 반기를 들며 뮌헨 제체시온을 이끌었던 이는 상징주의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 1863~1928)였다. 1898년, 뒤늦게 미술 공부를 하러 뮌헨에 온 칸딘스키는 슈투크의 제자가 되기 위해 3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채 1년도 못 견디고 그만두었다. 당시 슈투크의 회화반에서는 클레도 공부하고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또 다른 마이스터였던 요제프 알버스도 그의 제자였다. 그러나 클레도 오래 못 버티고 칸딘스키가 떠나기 반년 전인 1901년 3월 학교를 그만두었다. 격동의 시대, 렌바흐에 반기를 들었던 슈투크의 ‘유겐트슈틸(Jugendstil)’도 후에 추상회화라는 미술사의 엄청난 혁명을 일으킬 젊은 칸딘스키와 클레에게는 그저 지루한 화풍이었던 것이다.
 
빈 제체시온 전시관. [사진 윤광준]

빈 제체시온 전시관. [사진 윤광준]

뮌헨에 가면 ‘렌바흐 미술관’과 ‘빌라 슈튜크 미술관’은 꼭 들러 보아야 한다. 물론 ‘알테 피나코테크’와 ‘노이에 피나코테크’를 들른 후에 가보는 것이 좋다. 렌바흐 미술관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렌바흐의 화풍과는 정반대였던 칸딘스키와 청기사파의 그림을 원 없이 볼 수 있다. 오늘날 뮌헨의 예술적 가치는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오스트리아 빈에 비해 상당히 저평가되어 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칸딘스키와 청기사파가 갖는 예술사적 가치에 무지해서 그렇다.
 
뮌헨의 제체시온이 결성된 후, 가까운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또 다른 제체시온이 결성되었다. 1897년이다. 빈 제체시온은 뮌헨 제체시온에 비해 훨씬 강력했다. 일단 세기말의 빈을 대표하는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름만 열거하면 이렇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빈을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빈 제체시온의 잡지 ‘베르 사크룸(Ver Sacrum)’을 주관하며 그림뿐만 아니라 유겐트슈틸 방식의 공예품, 가구까지 제작했던 콜로만 모제르, 건축가로 활동하며 ‘빈 공방(Wiener Werkstätte)’ 설립에 주도적으로 활약한 요제프 호프만, 빈 분리파 전시관을 설계하고 다름슈타트 마틸덴회에(Mathildenhöhe)의 예술인마을 설계에 참여한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그리고 요하네스 이텐과 오스카 슐레머의 선생이며 칸딘스키에 앞서 추상화를 시도했던 아돌프 횔첼 등이다. (빈 제체시온과 빈공방에 관해서도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다음 회로 이어진다.)
 
빈 제체시온이 결성된 그 다음 해인 1898년, 베를린에서도 제체시온이 결성되었다. 계기는 1892년 베를린에서 일어난 ‘뭉크 스캔들(Munch-Skandal)’이었다. 처절한 뭉크의 그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베를린의 보수적 화단과 관객들은 뭉크의 전시회에 크게 반발했고, 전시회는 불과 8일 만에 문을 닫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뭉크는 매우 유명해져서 ‘스캔들로 유명해지다(succès de scandal)’라는 불어 관용어의 대표적 사례가 된다. 한편, 독일 미술사에서 뭉크 스캔들은 ‘현대미술(Moderne Kunst)’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기존 미술아카데미에 반대하는 젊은 화가들의 조직적 움직임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결국 1898년, 베를린 미술전시회의 보수적 전시 기준에 반대하는 젊은 화가들을 중심으로 베를린 제체시온이 결성되었다. 제체시온의 리더는 독일 인상주의를 대표하던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1935)이었고,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와 같은 여성화가도 참여했다. 뮌헨, 빈, 베를린에서 시작된 독일의 분리파 운동은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 독일 여러 도시에서 ‘제체시온’이 결성되었다. 제체시온은 정치적으로는 기존의 보수적, 역사주의적 미술아카데미에 대한 도전이었고, 내용적으로는 프랑스의 ‘아르누보(Art Nouveau)’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의 독일적 수용이었다. 그 결과물은 유겐트슈틸이라는 ‘예술과 공예의 에디톨로지’였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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