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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쫓겨온 외성인, 수만 명 학살 후 40년간 계엄령 통치

중앙선데이 2020.04.18 00:20 682호 26면 지면보기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대만의 비극, 2·28 시위

대만 본성인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2·28 시위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관의 조형물. 훗날 대만 정부가 공식발표한 희생자는 2만8000명이나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윤태옥]

대만 본성인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2·28 시위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관의 조형물. 훗날 대만 정부가 공식발표한 희생자는 2만8000명이나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윤태옥]

내가 변방을 여행하면서 바다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 것은 바다에서는 아주 먼, 티베트고원의 황하 발원지에서였다. 그곳에서 시작한 황하가 만나는 바다는 보하이(발해)만이다. 보하이만에서 시작되는 중국의 바다는 시계방향으로 황해(우리의 서해), 동중국해, 남중국해로 이어진다. 변방으로의 여행은 동아시아의 바다로 이어 간다. 첫 번째 기착지는 큰 지도에서 보면 대륙의 앞바다에 뚝 떨어진 듯한 섬, 동중국해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대만이다.
 

청일전쟁 패한 후 일본에 할양돼
일제 패망하자 내려온 국민당 정부
점령군처럼 본성인들 노골적 차별

1947년 노점상 사살로 시위 분출
장제스 계엄군에 2만8000명 숨져

대만 면적은 3.6㎢ 정도로 우리나라의 영남보다 약간 넓다. 산과 계곡, 바다와 절벽 등이 어우러져 절경의 파노라마를 이룬다. 지난해 11월 열흘 동안 대만을 해안선 따라 일주했다. 대만의 서해안은 갯벌이 다정다감하고 석양이 멋지다. 동해안은 장엄한 절경이다. 고개를 90도로 젖혀야 보이는 청수산해안도로의 깎아지른 절벽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 자리에서 몸을 돌리면 태평양이다. 산이 절벽을 타고 내려와 바다를 만나고, 바다는 짙푸른 색으로 수평선으로 멀어지다가 하늘과 만나서는 빛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680만 대만인, 처음엔 대륙 출신 환영
 
태평양이 내다보이는 대만 청수산해안도로의 절경. [사진 윤태옥]

태평양이 내다보이는 대만 청수산해안도로의 절경. [사진 윤태옥]

해안 일주를 마치고 수도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2·28 기념관을 보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갔다. 덜컥거리는 철로의 충격음과 함께 아름다운 섬의 슬픈 역사가 내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대만이 기록에 담긴 것은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짧다. 삼국지 오서(吳書) 손권전에 ‘이주(夷洲)’가 나오고, 수서(隋書) 동이열전에 ‘유구(流求)’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대만인지는 불분명한 것 같다. 12세기 들어서서야 송나라 사람들이 대만 본섬 50여㎞ 전에 있는 펑후(澎湖)의 섬들에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원과 명을 거치면서도 펑후의 섬들까지만 황제의 땅이었을 뿐 대만은 그 바깥이었다.
 
포르투갈은 동아시아로 바닷길을 연장하면서 1590년 전후 대만 해역에 다다랐다. 이들은 대만을 “아름다운 섬(Ilha Formosa)”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대만과 접촉하게 된 것은 네덜란드였다. 중국 연안에서 무역 거점을 확보하지 못한 네덜란드는 1624~1662년까지 39년간 타이난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다. 지금도 타이난시에는 그때 세운 질란디아 요새(安平古堡)가 남아 있다.
 
네덜란드를 밀어낸 것은 푸젠성 출신의 정성공(1624~1662)이었다. 명나라가 1644년 망하자 정성공은 주율건을 남명(南明)의 황제로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청군이 정벌해 내려오자 정성공은 1648년 봄부터 샤먼을 거점으로 청조에 저항했다. 청군에 밀린 정성공은 1662년 네덜란드를 축출하고 대만으로 옮겨 갔다. 정성공은 대만에 발을 디딘 지 1년여 만에 병사했고, 1683년 대만은 청조에 정벌되면서 대륙의 황제에게 편입됐다.
 
이후 200여 년의 역사는 대륙에서 이주해 온 한족에게는 ‘피눈물 나는 개간의 역사’였고, 토착민에게는 ‘농사짓고 사냥하던 삶의 터전을 상실해 가는 과정’이었다. 정성공 시대 대만의 한족은 12만 정도였고 토착민도 비슷했다.   200여 년이 지난 1906년 통계에는 한족 290만, 산지에 사는 토착민 11만 수준으로 바뀌었다. 숫자나 기록이나 계약 관념이 약했던 토착민은 한족 관리와 농민들에게 한 뼘 두 뼘 토지를 빼앗기며 밀려난 것이다. 한족 남자와 토착인 여성과의 결혼을 통한 한화 현상도 적지 않았다. “대륙 출신 아버지는 있어도 대륙 출신 어머니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만의 첫 번째 슬픈 역사다.
 
2·28 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4·3 제주특별전시회 안내 조형물. [사진 윤태옥]

2·28 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4·3 제주특별전시회 안내 조형물. [사진 윤태옥]

두 번째 슬픈 역사는 느닷없는 폭탄이었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1895년 대만을 일본에 할양(시모노세키 조약)한 것이다. 곧이어 대만에 상륙한 일본군은 5개월에 걸쳐 대만 전역을 평정했다. 대만사람들이 집단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1895년부터 1902년까지 1만2000여 명이 처형됐다. 마지막 무장투쟁은 1915년의 초파년(噍吧哖) 사건이었다. 여청방이란 인물이 앞장서서 파출소를 공격하면서 시작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초파년 지역의 장정 수천 명이 도살당했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만 866명이었다. 정치적 격변에 죽임을 당했고 일상의 굴복 속에 지속적인 차별이 계속됐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만 인수를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680만 대만인(본성인)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국민당 군대와 함께 대륙 출신(외성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권력을 갖고 총을 쥐고 온 외성인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본성인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대륙에서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부패 시스템을 대만에 전면 이식했다. 군대와 경찰의 횡포가 극심해 시호(市虎)라고 불렀다. 반공 노이로제에 걸린 국민당은 이념을 살인병기로 마구 휘둘렀다.
 
그러다가 1947년 2월 27일 대만성 전매국 소속 단속반에게 담배 노점상 한 사람이 권총으로 사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본성인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2·28 시위는 전매국을 겨누어 시작됐으나 곧 본성인 차별철폐 등 대대적인 개혁 요구로 번져 나갔다. 대만 행정장관은 협상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장제스 총통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3월 초 계엄군 2개 사단이 대만에 상륙했다. 이들이 들이닥치는 도시는 하나씩 하나씩 학살의 생지옥이 됐다. 이것이 2·28 사건이다.
  
타이베이서 만난 ‘4·3 제주’ 닮은꼴 통한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훗날 대만 정부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는 2만8000명이었다.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1960년 호적조사에서 실종자로 분류된 12만여 명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2·28 사건 희생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3·1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을 때 사망자가 350~630명 수준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사망 실종이 600명 수준이었으니 2·28 사건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때 선포된 계엄령은 중화민국 정부의 철권통치로 이어졌다. 누구도 그때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수 없었고, 물어볼 수도 대답할 수도 없었다. 40년 동안 고통이 쌓이고 쌓이면서, 수많은 저항을 거쳐서야 1987년 계엄령을 해제시킬 수 있었다. 대만의 역사학자 저우완야오(周婉窈)는 계엄령 해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제야 좌우의 사상문제로 잡혀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고, 모국어(대만 지방어) 사용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속한 족군(族群)의 과거를 억지로 잊지 않아도 되고, 국정교과서만으로 역사를 배우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향토를 알 기회를 갖게 되고, 소수집단도 점차 중요하게 간주됐다.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나는 타이베이의 2·28 기념관에 연결된 지하철 타이다병원역에서 하차했다. 출구를 나와 기념관 입구에 다가가면서 나는 또 다른 충격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기념관 입구에 특별전시회를 알리는 조형물 하나가 소리 없는 폭발음으로 나를 덮쳐온 것이다. 바로 4·3 제주였다. ‘2·28 국제인권전’이란 제목으로 꽤 큰 전시실에서 제주의 4·3을 보여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2·28 사건 전시실을 둘러보고는 떨리는 발길로 4·3 전시실에 들어섰다. 남의 나라에서 대면하는 우리의 슬픈 역사, 전시실의 첫 구절은 ‘아름답고 슬픈 섬(島嶼的美麗與悲傷)’이었다. 대만과 제주는 오키나와와 함께 수십만 년에 걸쳐 자연이 조각해낸 지극한 아름다움이 사람이 저지른 고통의 역사와 공존하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똑같은 속내를 품고 있는 변방의 섬들이었다.
 
변방에는 화산재처럼 쌓인 슬픔이 구멍 숭숭 뚫린 화산석처럼 굳어버린 폐병의 흔적도 있다. 언젠가 그 고통이 응집하고 폭발하여 중원을 삼킬 수도 있다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건 먼 훗날의 환청으로 들릴 뿐이다. 그날 나는 서로 다른 두 섬의 똑같은 역사를 변방의 한 섬에서 직면했다. 그리고는 내 소심한 가슴만 쓸어내렸다. 그들의 지극한 통한을 어루만져 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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