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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덕수궁 아닌 경운궁, 역사의 기억을 되찾다

중앙일보 2020.04.16 01:21 종합 22면 지면보기

대한제국의 얼굴 경운궁

1910년 무렵 서울 경운궁 풍경이다. 대한문 앞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사라진 월대가 보인다. 문화재청은 내년까지 월대를 복원 할 계획이다. [사진 문화재청]

1910년 무렵 서울 경운궁 풍경이다. 대한문 앞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사라진 월대가 보인다. 문화재청은 내년까지 월대를 복원 할 계획이다. [사진 문화재청]

지난주 문화재청에서 경운궁(慶運宮) 월대(月臺·궁궐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를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잘된 일이다. 경운궁은 고종이 일으킨 대한제국의 중심이었으니 가급적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옳다. 어떤 언론 기사는 덕수궁 월대를 복원하는 결정이라고 썼다. 잘못된 표현이다.

경운궁 월대 복원 결정 환영할 만
개화기 서울 풍경에 서양인 반해
궁궐 방문은 당시 최고 관광코스
창덕궁 후원은 내·외빈 초청 명소

 
덕수궁은 건물 이름이 아니라 사람 이름이다. 경운궁 주인 고종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핍박해 강제 퇴위시킨 일본은 고종에게 은퇴한 임금이라는 뜻으로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를 붙였다. 경운궁 주인이 덕수궁으로 몰락하고 다시 세상을 떠남에 따라 경운궁은 제 모습도 제 기억도 잃었다. 월대의 복원은 말살된 기억의 회복이다.

 
사진은 현재 모습. [사진 문화재청]

사진은 현재 모습. [사진 문화재청]

서울에는 조선 궁궐이 다섯 있다. 모두 사연이 있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세웠다.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옮겨오면서 창덕궁을 세웠다. 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이 상왕이 되어 살던 궁궐은 성종 대에 창경궁으로 거듭났다. 선조는 의주에서 한양으로 환도한 후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옛집에 행궁을 차렸다. 광해군은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명명했지만 당시 인목대비가 유폐된 이곳은 서궁이라 불렸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만나 광해군이 세운 경덕궁에 잠시 거처했다. 영조는 경덕궁을 경희궁이라 개명하고 새 주인이 됐다. 정조와 고종은 세 궁궐의 주인이었다. 정조는 창경궁(출생)·경희궁(동궁)·창덕궁(국왕)으로, 고종은 창덕궁(즉위)·경복궁(친정)·경운궁(황제정)을 거쳐 갔다.

  
독일기자 겐테 “가장 아름다운 도시”

 
고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은 세칭 개화기였다. 근대 전기 문명이 처음 유입됐다. 미국은 에디슨 전등회사가 1882년 뉴욕에 처음 대규모 전등 공급을 마련했는데, 조선은 에디슨 전등회사의 전동 설비에 기반해 미국인 전등 기사 멕케이가 1887년 경복궁 안에 전등소를 가설하고 백열등을 밝혔다. 미국은 전기철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프레이그가 1888년 리치몬드에 처음 전철을 가설했는데, 한국은 황실과 콜브란-보스트위크 회사가 연합한 한성전기회사가 서울에 전차를 운행했다. 1898년 9월 15일 경희궁 앞에서 전철 기공식이 열렸고, 1899년 5월 4일 경교~동대문 구간의 전철 개통식과 전차 시승식이 거행됐다.

 
1901년 방한한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1901년 방한한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서울의 변화는 한국을 찾아온 서양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901년 6월 한국을 방문한 독일 쾰른신문사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는 아시아에서 가장 독특한 풍경이 서울에 있음을 발견했다. 서울의 전기 문명에 주목한 그는 베이징·도쿄·방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도 서울처럼 전신·전화·전차를 동시에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서울의 입지 조건을 잘츠부르크나 테헤란에 비하면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주지로 서울을 손꼽았다.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보며 그는 진정한 옛 모습을 잃어가는 베이징이나 개성이 점점 희미해지는 일본과 달리 서울에 대단한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겐테는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경운궁에 가서 고종을 알현했다. 독일어학교를 방문해 수업 광경을 지켜보고 학력평가를 취재하기도 했다. 그의 한국 여행은 서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금강산과 한라산에 올랐고 동해와 제주 바다를 구경했다. 제물포 인(in), 목포 아웃(out) 코스로 한국을 여행한 그는 약 5개월 기간 서울 관광과 함께 한반도 횡단 여행 및 제주도 특별 여행까지 다녔다. 이와 달리 잠깐 서울에 들렀다가 한국을 떠나는 서양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럴 경우 서울 관광의 핵심은 단연 궁궐 관람, 그중에서도 경복궁과 창덕궁 관람이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주합루. [연합뉴스]

창덕궁 후원에 있는 주합루. [연합뉴스]

서양 사람들이 궁궐을 관람하려면 고종 황제의 허락이 필요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궁내부안(宮內府案)』에는 서양 사람들의 고종 알현과 궁궐 관람을 위해 대한제국 외부와 궁내부 사이에 오간 공문서가 다수 수록돼 있다. 이를테면 서울 주재 독일 영사 하인리히 바이페르트는 1901년 5월 2일 오후 4시 고종을 알현하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친서를 봉정했고, 바우만을 포함한 독일 사람 몇 명의 경복궁 관람을 위해 4월 17일 오전 10시 한국 순검이 세창양행 앞에 파견됐다. 독일 외에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울 주재 외교관의 요청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각국 외국 공관에 관람 허가증 발급

 
궁궐을 찾는 외국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이에 따라 외국인 궁궐 관람의 편의성을 높이려는 방법을 강구하게 됐다. 6월 8일 일본 공관의 조회 문서는 외국인 서울 관광의 불편함을 이렇게 말했다. 서울은 고궁을 제외하면 별로 관람할 곳도 없는데 관람 허가를 받으려면 각국 외교 공관이 매번 한국의 외부 및 궁내부를 거쳐 허락을 받는 관계로 절차도 번잡하고 처리도 지연된다고…. 7월 31일 궁내부는 궁궐 관람을 위한 행정 개혁안을 제시했다. 예식원에서 ‘외국인 유람 빙표(憑票·허가증)’를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서울 주재 각국 공관에서 예식원에 공문을 보내 빙표를 수령해 관람객이 이를 지참해 궁궐 파수 순검에게 주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궁내부의 제안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반대에 직면했다. 하야시는 역제안을 던졌다. 하나는 각국 외교 공관이 문표 1개를 수령해 상시 보관하고 있다가 궁궐 관람 희망자가 있으면 공관 소속자가 문표를 지참하고 관람객을 데려가서 지도하는 방안이다. 다른 하나는 궁내부에서 각 궁전 기호가 있는 문표 12매를 각국 외교 공관에 보내면 그 문표 1매로 동시에 몇 사람이 입장해 관람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궁내부는 사전에 문표를 미리 보낼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으며, 각국 공관이 예식원과 접촉해 문표를 수령하는 것으로 행정 간소화가 충분히 달성된다고 보았다.

 
갑오개혁 이후 왕실 업무를 기록한 궁내부일기.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갑오개혁 이후 왕실 업무를 기록한 궁내부일기.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궁내부는 궁궐 관람 문제도 유념했지만 궁궐 관리 문제도 주의해야 했다. 간혹 일본 군인의 궁궐 무단 난입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6월 21일 오전 10시 무장한 일본군(사관 3인과 병정 92인)이 함부로 창덕궁에 침입한 사건은 일본군 수비대 일부가 군사 훈련으로 행군 도중 산기슭에서 길을 잃어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간 우발적인 실수였다고 하지만 창덕궁 보호에 만전을 기하지 못한 현실을 보여준 것이었다. 창덕궁 후원은 본래 정조와 강세황의 초겨울 깜짝 나들이, 또는 효명세자와 시강원 궁료의 봄날 야회가 열렸던 문화 공간이었지만 고종 때에는 갑신정변 당시 포위된 일본군이 저항하고 탈출했던 격변의 현장이기도 했다.

 
창덕궁 후원에 대한 특화된 관심을 배경으로 비원이 출현한 것은 1903년이었다. 창덕궁 후원을 비원이라 칭하고 비원 구역 안의 제반 사무를 관장하는 별도의 비원 관직이 궁내부 관제 안에 마련됐다. 본래 금원(禁苑)이라 불렀던 구역을 왜 비원이라 고쳐 불렀는지, 그리고 별도의 비원 기구가 왜 필요했는지는 미상이다. 다만 비원이 후일 내외국 내빈을 초청해 원유회를 개최하는 장소로 자주 쓰인 것으로 보면 본래의 취지도 그렇지 않았을까 한다. 대한제국의 비원 원유회로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은 1906년 9월 14일 만수성절(고종의 생일)을 경축하는 생일잔치다. 이날 시가에는 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서울은 축제의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뤘다.

 
찰나의 섬광이었을까. 그간 덕수궁밖에 모르는 식민지 기억에서 경운궁은 생소했다. 식민지 비원밖에 모르는 짧은 지식에서 조선의 창덕궁은 생소했다. 궁내부 비원은 더욱 생소했다. 경운궁 시절 외국인의 대한제국 관광이라는 역사 지식이 기억의 회복에 보탬이 될까.

 
대한제국의 공업중심지 용산
대한제국(1897~1910) 시기 서울에서는 한창 도시 개조 사업이 진행됐다. 독립문·환구단·장충단·기념비전·탑골공원 등 각종 도시 기념물과 시설물이 세워졌다. 기념비전은 현재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있는 전통궁궐건축물을 가리킨다. 환구단의 부속물 석고(돌북)와 함께 1902년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경축하는 도시 기념물이었다.

 
경운궁은 근대 도시 서울의 교통 중심으로 거듭났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선형 도로망이 구축됐고, 전기철도가 가설됐다. 전철 노선은 서대문~동대문~청량리 구간의 본선과 용산선과 의주선의 지선으로 구성됐다.

 
서울 전철 노선은 서울의 최대 상업지인 종로·이현·칠패와 서울의 신흥 공업지인 용산의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용산선 개설 이후 용산에는 도량형제작소·전기발전소·총기제조소 등 각종 공업 시설물이 들어섰다. 식민지 용산에 앞선 대한제국의 용산이었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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