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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누구 찍었소?" 투표하고 나온 할머니에게 물으니

중앙일보 2020.04.15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36)  

 
코로나19로 인해 이번 선거는 정말 조용하고 차분한 것 같다. 지난주에 온 손님이 자기 동네 팔각정에 모인 어르신들의 막걸리 파티에서 들었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골 어르신들은 한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았는데 정치에 대해 알기나 하나’라는 나의 편견과 무지를 반성하게 해주었다. 오늘 나는 사전투표를 하고 왔다. 이번 주에 총선이 있으니 그 이야기를 각색해 펼쳐본다.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선거 이야기를 한다. 선거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 후보자들을 다 조사한 듯 족집게 도사같이 들춘다. 소속된 당과 그 당의 역사는 물론, 그 당에 몸담았던 이전의 인물들을 기억하고 우리 고장의 무엇을 발전시켜놓았는지 잘못 했는지 평을 한다. 그리고는 후보들을 줄 세워서 우선 이곳이 고향이거나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을 다시 추려낸다. 선발된 몇 후보로 압축되어 편이 갈리는데, 옆에서 귀동냥으로 들어 본 팔각정 토론이 TV토론보다 더 재밌고 생각할 거리가 있었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평가하면서 이 사람이 다닌 학교에서부터 인성까지 옆집 아들 칭찬하듯, 흉보듯 하는데 후보 부모의 윗대까지의 행적을 다 알고 있다.
 
어르신들이 선거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 후보자들을 다 조사한 듯 족집게 도사같이 들춘다. ‘시골 어르신들은 한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았는데 정치에 대해 알기나 하나’라는 나의 편견과 무지를 반성하게 하였다. [중앙포토]

어르신들이 선거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 후보자들을 다 조사한 듯 족집게 도사같이 들춘다. ‘시골 어르신들은 한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았는데 정치에 대해 알기나 하나’라는 나의 편견과 무지를 반성하게 하였다. [중앙포토]

 
수년에 걸쳐 이룬 한 가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놓고(그날은 다리 공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전 현직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시장, 동장까지 자기 끗발로 이룩한 거라고 내세우는 선거 시기라 정답 비슷한 것은 말발 센 동네 어르신의 큰 목소리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저기 저 대교를 자신의 전적이라고 하지만 그건 아니여. 전 전 의원이 어렵게 국비를 끌어와서 착공한 거 아닌가.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서 미뤄지다가 준공 때 있던 저 후보는 숟가락만 얹은 셈이여. 해놓은 게 별로 없어.”
 
“이 후보는 그 동네에서도 소문났었지. 머리가 비상해서 좋은 학교 나오고 외국까지 가서 공부했으니 똑똑한 사람이제. 옆집에 모모랑 같이 다녔지. 이 후보 아들도 예의 바르고 똑똑하다지…. 그런데, 다 좋은데 말이여, 그 애비가 글러 먹었어. 고을에 땅이란 땅은 모두 다 갖고 있으니 우리 윗대 어른들까지 모두 그 집 농토를 세 얻어 농사지었잖아. 얼마나 야박하고 짠돌이인지 보릿고개 넘어갈 때도 이자 한번 깎아 주는 해 없이 우리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인정머리라곤 씨알도 없는 영감 아니던가. 나랏일을 볼라치면 가장 낮은 자세로 주위를 살펴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제. 어려움 없이 자란 인물이라 부전자전 될까 봐 그것이 좀 마뜩잖네.”
 
 
이쯤 되면 시골 영감이라고 허투루 볼 수 없는 후보평가다. 이전의 고무신 받고, 봉투 받아 아무나 찍던 시대랑은 전혀 다른, 어르신이 똑똑한 세상이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꾼 같은, 한 어른의 이야기에 점 찍어 놓은 표심이 흔들린다. 투표 날까지 후보들은 동네어른들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저울질당하며 애간장이 탈 것이다. 정치의 야망을 가진 후보들은 타고난 천지신명의 기운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 사람을 에워싼 삶의 모습이 그 사람의 모양을 말해주고 있으니 정말 잘 살아야 할 것 같다.
 
사전투표를 마친 지인의 SNS에 올린 글을 읽으며 잠시 웃어본다. 여수 섬마을에서 자식들의 보호를 받으며 배를 타고 먼 길을 나와 사전투표를 하신 한 할머니, 투표를 마치고 나오자 자식들이 물었다.
 
“엄니, 누구 찍었소?”
“으응, 선거하느라 모두 애 묵었으니 다 찍어 줬제.”
 
헉, 그 할머니의 한 표는 무효표가 되었겠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겠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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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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