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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화 경쟁력은 단색조 회화...자리매김은 이제 시작"

중앙일보 2020.04.14 16:17
김덕한, Overlaid Series No. 20-17, 2020, 패널에 옻칠, 90x90cm, [사진 박여숙화랑]

김덕한, Overlaid Series No. 20-17, 2020, 패널에 옻칠, 90x90cm, [사진 박여숙화랑]

김태호, Internal Rhythm 2019-13 2019_Acrylic on canvas_163x131.5cm [사진 박여숙화랑]

김태호, Internal Rhythm 2019-13 2019_Acrylic on canvas_163x131.5cm [사진 박여숙화랑]

박서보, 정상화, 윤형근, 정창섭, 김창열 한국을 대표하는 단색화가 작품부터 차세대 단색화 작가로 불리던 김택상, 남춘모, 김태호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덕한, 윤상렬 이진영 등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대가들의 품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그림들 사이에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하얀 달항아리, 권대섭 작가의 작품이다. 회화와 사진, 도예가 함께 한 전시가 친근하면서도 새롭다. 거장들의 위엄과 젊은 작가들의 당당함이 팽행하게 하나로 어울렸다. 
 

박여숙화랑,'텅 빈 충만' 전
회화부터 도예, 사진 망라해
대가부터 젊은 작가 18인 참여

지난 10일부터 서울 이태원 박여숙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텅 빈 충만'전의 풍경이다. ‘단색조 회화’를 대표하는 주요작가 총 18명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큐레이터이자 미술비평가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기획한 전시로 오랜 기간에 걸쳐 해외에서 소개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았다.  
 
전시의 원제는 '텅 빈 충만:한국 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으로 2014년 중국 상하이 SPSI미술관에서 처음 열린 이래 베이징 한국문화원, 독일 베를린 한국문화원을 비롯,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브라질 상파울루, 홍콩, 아르헨티나 부네노스 아이레스, 이란 테헤란 등지에서도 선보였다. 
 

"단색화 아니고 단색조 회화"  

또 단색화인가? 이런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 그동안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단색화'라는 용어가 사용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여숙 화랑 대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국제무대에서 자리매김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세계적인 상품은 뭐니뭐니해도 단색조 회화"라며 "이제야 해외 컬렉터들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를 알리는데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기존 단색화 전시와는 다르다"고 했다. 그동안 미술계에서 써오던 용어 '단색화' 대신 '단색조 회화'라는 용어를 택했다는 점에서다. 전시를 기획한 정준모 큐레이터는 "그동안 한국의 단색조 회화는 세계적인 약진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모노크롬’ (Monochrome)의 번역어인 '단색화'란 명칭을 사용하며 오히려 좁은 틀 안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이 용어 때문에 단색화가 서구미술의 아류처럼 비치고, 단색화라는 언어적 한계로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색'에 갇혀 있었다"는 것. 따라서 "그동안 우리 회화가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 저변의 미학과 정서를 새롭게 탐구하고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단색조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색이 아니라 그 화면이 형성되는 과정이란다. 그는 "서구의 미니멀 아트가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작업하는 ‘결과의 예술’이라면, 한국의 단색조 회화는 끊임없이 반복해 작업하는 ‘과정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매우 다르다"며 "한국 단색조 회화는 서양과 형식적으로는 유사한 듯하지만 한국인의 정서적 감성이 내용적, 미학적으로 다르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에 굳이 '단색조 회화'라는 명칭을 내세운 이유다. 
 
그는 "단색조 회화 안엔 수묵화와 서예의 정신인 여백, 관조, 기, 정중동, 무위자연, 풍류 등 한국의 정신적 가치가 담겨 있다."면서 "이는 마치 한국인들이 즐기는 냉면의 밍밍하면서도 감칠맛과 닮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색조 회화의 특징으로 ▶재료의 ‘물성’을 통한 ‘시각적 촉감’ ▶‘시간의 중첩’ ▶‘행위의 반복’ 등을 꼽았다.   
 

더 넓게, 더 깊게 

김택상, Breathing light-jade green, Acrylic on canvas, 177x131cm, 2017 [사진 박여숙화랑]

김택상, Breathing light-jade green, Acrylic on canvas, 177x131cm, 2017 [사진 박여숙화랑]

이진영, 운화몽, 2019, 한지에 잉크젯 프린트, 198x122cm[사진 박여숙화랑]

이진영, 운화몽, 2019, 한지에 잉크젯 프린트, 198x122cm[사진 박여숙화랑]

단색조 회화는 그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가 형태를 갖추어 간다는 점에서 시간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중견 작가 그룹 중 눈에 띄는 김태호의 작품도 그런 맥락 위에 있다. 그는 색을 쌓고 다시 긁어내고 다시 쌓은 다음 긁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방식으로 미묘하게 중첩된 색채를 만들어냈다. 색을 겹겹이 쌓아올렸으면서도 투명한 깊이감을 만들어낸 김택상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얇디 얇은 천을 색을 풀어놓은 맑은 물에 적셨다가 말리는 과정을 통해 신비로운 색상을 만들어낸다. 맑은 색으로 승부하는 그의 작품은 색을 쌓아 올린 게 아니라 시간을 쌓아 올린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정 넓이로 자른 광목천을 섬유강화플라스틱(FRP)을 발라 건조해 ‘ㄷ’자 모양의 기본형태를 만든 뒤 이를 전후좌우로 이어 붙여가며 하나의 부조 같은 회화를 완성하는 남춘모의 작품도 보여준다.  
 
젊은 작가그룹 중 한국의 오랜 전통 안료인 옻칠을 통해 작업하는 김덕한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공예품의 주재료로 쓰였던 옻칠을 현대미술로 끌어와 반복되는 사포질로 색의 흔적을 드러냈다. 이밖에 신문이나 잡지 등의 종이에 드로잉을 하는 최병소, 캔버스 위에 태운 숯을 붙이고 한지로 덮은 다음 쇠솔로 문지르고 긁어내는 작업으로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낸 이진우 등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달항아리의 미학 

권대섭, 달항아리, 백자호02, 2019, Ceramic, 51.4x59cm[사진 박여숙화랑]

권대섭, 달항아리, 백자호02, 2019, Ceramic, 51.4x59cm[사진 박여숙화랑]

가장 특이해 보이는 것은 이 그림들과 함께 자리한 달항아리다. 정 큐레이터는 이에 대해 "권대섭의 달항아리는 재질에서는 서양의 도자기와 일치하지만, 기법이나 색채 그리고 내용 면에서는 한국의 단색조 회화와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    
 
이어 "단색조 회화는 하나의 균질한 색채로 보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화면의 호흡이 느껴지면서 신비로운 느낌마저 드는 것이 특징"이라며 "우리가 그동안 단색조 회화를 너무 단순한 시각으로 정리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우리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폭과 깊이가 한 뼘 더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5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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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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