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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의 시선] 반품 필수 ‘총선 언박싱’

중앙일보 2020.04.13 00:23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승현 논설위원 겸 정치에디터

김승현 논설위원 겸 정치에디터

‘언박싱(unboxing)’은 유튜브 대표 콘텐트 중 하나다. ‘신제품의 상자를 연다’는 단세포적 행위가 세계 동영상 트렌드가 되자 문외한들은 어리둥절했다. 6년 여전 장난감 포장을 뜯은 뒤 재미나게 노는 것만으로 대박을 친 동영상이 대표적이다. 소꿉놀이 같은 영상이 구독자 수백만 명에 연 매출 수십억 원을 달성했다. 이후 IT 기기, 명품가방 등 또 다른 언박싱 동영상이 수백만 조회 수를 이어갔다. 주야장천 먹기만 해도 돈을 버는 ‘먹방 스타’에 이어 언박싱의 성공 또한 아재들에겐 놀라운 사건이었다.
 

유튜브 언박싱 성공 비결은 설렘
정책 알리고 평가받는 총선 닮아
승리 매몰된 무개념은 반품해야

유튜브 생태계는 단순·명료했다.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사이면서 그 관심의 유사성이 높으면 돈이 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늘 내뱉는 말 속에 ‘비즈니스 모델’이 숨어 있었다. 모두의 삶에서 우선순위에 있는 먹는 일을 있는 그대로 영상에 담은 먹방에 돈이 모였다.
 
언박싱은 “돈 모아서 저 제품 꼭 사야지”하는 ‘신상’에 대한 비슷한 동경과 설렘을 포착한 경우다. 유튜브 속 언박서(언박싱 하는 출연자)의 자유분방한 상품평에도 사람들은 공감한다. “와우, 포장이 너무너무 이쁘죠. 소장 각입니다” 하는 시답잖은 리액션에도 ‘좋아요’를 누른다.
 
먹방과 언박싱을 한 번 보면 눈을 떼기 어려운 건 오로지 인간의 감성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식욕·구매욕의 대리 만족, 사전 체험이라는 즐거움을 준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가치를 두는 수백만의 소비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시청자로서 소비 감성을 충족시킨 이들은 다시 언박서가 되기도 한다. 그런 연쇄 반응이 유행을 만들고 소비를 발생시키고 매출을 늘렸다. 마치 유튜브의 계획이 있었던 것처럼 거대한 트렌드가 형성됐다.
 
언박싱은 진화하고 있다. 최근 국내 최고 자동차 회사는 새로 출시한 신차를 소개하면서 ‘디지털 언박싱’이라는 이름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차를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보석이 세공되는 느낌을 시도했다”며 디자인 컨셉을 설명했다. 수천억 원대의 투자가 이뤄진 신차 제작에 참여한 전문가가 공유하는 진솔한 이야기를 접한 소비자가 뭘 더 바라겠는가. 화려하고 감각적인 광고보다 제품 신뢰도를 올리는 데 그의 언박싱은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틀 뒤의 4·15 총선도 정치인이 스스로를 알리고 그 성적표를 받는 날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언박싱이다. 총선의 면면을 소개하는 본지의 디지털 콘텐트에 ‘총선언박싱’이라는 문패가 붙기도 했다. 정치인의 비전과 정책을 박스에서 꺼내 설명하고 유권자의 피드백을 받는 일이니 비슷한 게 사실이다. 다양한 매체의 선거 보도에도 언박싱이란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유권자의 반응은 유튜브의 다른 언박싱과 천양지차다. 초등학생의 장난감 언박싱보다 더 한심하고 실망스러워서다. 선거일에 이르는 동안 정당과 정치인에게서, 그들의 약속과 연설에서 동경과 설렘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눈 뜨면 막말, 눈 감으면 말바꾸기다. 어쩌면 이리도 유권자의 감성과 다를 수 있을까. 거대 양당만 ‘위성 정당’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위성정당이 버젓이 투표용지에 적혔고, 수천억원이 아니라 십수조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정책은 제대로 계획하고 고민했는지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책으로 내놓은 긴급재난지원금은 소득 하위 70%에 100만원(4인 가족 기준)을 주겠다는 당·정·청의 계획이 갑자기 발표되더니, 1주일 넘게 지급 대상 기준도 못 정했고 총선 앞두고는 대상을 전 국민으로 바꿨다. 미래통합당이 ‘전 국민 50만원’을 들고나오자 더불어민주당은 손바닥처럼 뒤집었다. 야당에선 야당대로 전 국민 지급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쯤되면 그들이 말하는 ‘안정’과 ‘심판’이 뭐가 다른지, 선거 뒤엔 말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알 길이 없다. 10조원 넘는 혈세를 쓰는 정책에도 원칙과 컨셉이 없고, 선거를 위해서라면 누구의 돈이든 떡 주무르듯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금배지 달겠다고, 다수당 되겠다고 국가의 경제와 미래, 원칙과 신뢰는 안중에 없다. 여든 야든 총선을 이기고 나면 또 얼마나 오만해질지 걱정이 앞선다. 상품박스에 벽돌을 담아 놓고 스마트폰이라 언박싱하는 무개념 사기꾼들과 다를 게 뭔가. 지난 10일과 11일 치러진 사전투표에 역대 최고인 1174만 명(26.7%)이 참여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벽돌을 스마트폰이라 우기는 언박싱은 반드시 반품하겠다는 소비자 정신이 발동된 것인지 준엄한 민심이 자못 궁금하다.
 
김승현 논설위원 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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