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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오판…3개월전 '붉은 여명'의 코로나 경고 무시했다

중앙일보 2020.04.12 17:16
미국 정부 내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지난 1월부터 신종 코로나 대책을 논의한 '붉은 여명(Red Dawn)' 그룹에 참여한 로버트 캐들렉 보건부 차관보. 그는 에바 리 조지아공대 교수의 조언에 따라 지난 2월 26일 학교 폐쇄 등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 도입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AP=연합뉴스]

미국 정부 내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지난 1월부터 신종 코로나 대책을 논의한 '붉은 여명(Red Dawn)' 그룹에 참여한 로버트 캐들렉 보건부 차관보. 그는 에바 리 조지아공대 교수의 조언에 따라 지난 2월 26일 학교 폐쇄 등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 도입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AP=연합뉴스]

 
미국 정부 안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정점을 통과하는 지금보다 3개월 앞서 조기 경보를 울린 전문가 그룹 '붉은 여명(Red Dawn)'이 있었다고 뉴욕타임스가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소련 침공 가상 영화 'Red Dawn' 본 따,
범정부 보건전문가 1월부터 집단 논의
뉴욕타임스, 붉은 여명 e메일 80쪽 공개
"우한 무증상 20대 여성 친척 5명 감염,
학교·교회·직장 폐쇄 조기에 실시" 권고
증시 폭락하자 트럼프 거부해 도입 무산

 
'붉은 여명'은 듀에인 카네바 국토안보부 최고 의료책임자가 1월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 발병이 알려진 직후 만든 질병통제센터(CDC)·보건부·국무부·보훈부와 민간 의료전문가들의 e메일 그룹 이름이다. 이들은 1월부터 "바이러스 봉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학교 폐쇄를 포함한 억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3월 16일에야 수용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한 80여 페이지 분량의 e메일을 공개했다. 이들의 '붉은 여명'이란 이름은 패트릭 스웨이지와 찰리 쉰이 주연한 1984년작 영화 제목을 본떴다. 소련과 쿠바 연합군이 미국 본토를 침공한 상황에서 고교생들의 레지스탕스 투쟁을 다룬 가상 현실 영화다.
 
소련의 미 본토 침공 가상 상황을 다룬 패트릭 스웨이지, 찰리 쉰 주연의 1984년작 영화 '붉은 여명'.

소련의 미 본토 침공 가상 상황을 다룬 패트릭 스웨이지, 찰리 쉰 주연의 1984년작 영화 '붉은 여명'.

 
카네바 박사는 "신종 코로나에 대응하는 다양한 동료 사이에 생각과 우려, 문제 제기와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붉은 여명을 만든 것"이라고 적었다. 초기 카네바 박사의 가까운 지인에서 출발한 '붉은 여명'은 2월 중순엔 앤서니 파우치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장, 로버트 레드필드 CDC 소장 등 백악관 태스크포스팀 주요 멤버들도 포함돼 40명이 넘었다.
 
찰스 메셔 보훈부 고위 의료 자문관은 1월 28일 e메일에서 "세계보건기구(WHO)와 CDC는 과소평가하고 있지만, 발병 예측 규모는 이미 믿기 힘든 수준"이라며 "중국의 폐쇄 조치는 1918년 스페인 독감 당시 필라델피아를 연상시킨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학교 폐쇄를 외칠 때 장난을 하느냐고 여겼지만 이제 내가 대학을 휴교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고 적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고문을 지낸 제임스 롤러 네브래스카 의대 교수는 같은 날 "역사상 거대한 과소평가 사례는 폼페이 화산 폭발을 그저 먼지 폭풍이라고 하고, 히로시마 원폭을 심한 여름의 폭염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한을 좀 나쁜 계절 독감으로 치부하는 것"이라고 답장했다.
 
미국에선 워싱턴주에서 1월 22일 최초 감염자가 발생한 뒤 확진자가 10명에 불과할 때 나온 경고였다. 또 신종 코로나는 전파력은 높지만, 감염자 대비 치사율은 0.1(계절성 독감)~1.0% 사이로 평가할 때였다. 현재 치사율은 미국 3.9%, 중국 4.0%, 프랑스 10.6%, 이탈리아 12.8%로 치솟았다.
 
에바 리 조지아공대 의료보건 계량분석센터 소장은 2월 '붉은 여명'그룹에서 무증상 감염자에 의한 신종 코로나 역내 확산을 경고하며 "당장 학교, 교회 폐쇄 등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조지아공대]

에바 리 조지아공대 의료보건 계량분석센터 소장은 2월 '붉은 여명'그룹에서 무증상 감염자에 의한 신종 코로나 역내 확산을 경고하며 "당장 학교, 교회 폐쇄 등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조지아공대]

 
이들의 조기 경보는 1월 29일 피터 나바로 백악관 통상·제조업 국장이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미국에서 50만명 이상 사망할 수 있다"는 메모를 배포한 시점과 대략 일치한다. 또 이튿날 알렉스 에이자 보건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인 입국 제한 조치의 최종 승인을 받기 위한 통화에서 "신종 코로나가 글로벌 팬데믹(대유행)으로 번질 수 있다"고 보고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공포심을 조장하는 소리는 말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2월 한 달 동안 중국 여행제한 외에 정부가 별다른 대응 조치를 하지 않은 이유다. 심지어 질병통제센터(CDC)가 각 주에 배포한 진단키트가 불량이어서 검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에바 리 조지아공대 의료·보건 계량분석센터 소장은 2월 3~6일 e메일에서 "중국 후베이 성 감염자 대비 20%가 입원하고, 치사율이 4%에 이른다"며 "불확실성을 고려하더라도 계절성 독감의 10~30배로, 그것도 전체 감염지역을 폐쇄한 상황에서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에 낮게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대중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사회적 거리 두기 권고를 전략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 돌아온 미국민의 전수 검사도 권고했다.
 
에바 리 소장은 2월 10일 e메일에선 일본에 정박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에서 검사 대비 확진자가 3분의 1에 이르는 상황을 언급하며 "크루즈선 한 척조차 확산을 봉쇄할 수 없다"며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달 17일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는 최악의 집단적 모임에서의 감염 사례"라며 "대형 쇼핑몰에서 3~6시간 걷거나 먹고 마시고, 만지는 것이나 학교에서 몇 시간 같이 수업하고, 폐쇄된 사무실에서 8시간 같이 일하는 것도 다를 바 없다"라고도 지적했다.
 
에바 리 박사가 '붉은 여명' 그룹에서 e메일로 논의한 산타 클라라 도시 학교 직장 폐쇄 조치의 감염 억제 효과.[뉴욕타임스]

에바 리 박사가 '붉은 여명' 그룹에서 e메일로 논의한 산타 클라라 도시 학교 직장 폐쇄 조치의 감염 억제 효과.[뉴욕타임스]

 
로버트 캐들렉 보건부 차관보는 같은 달 23일 에바 리 박사에게 "우한에서 20살 젊은 여성이 아무 증상도 없이 최초 검사에서 음성 반응이 나왔는데 친척 5명을 감염시켰다는 게 맞느냐"며 "그렇다면 우리 발열 검사와 감염자 자가 격리 조치에 큰 구멍이 있다는 얘기다"라고 물었다. 리 박사는 곧바로 "미 의학협회보(JAMA)에 실린 사례로 다른 무증상 감염 사례는 많다"며 "사람은 바이러스를 어디든 운반할 수 있기 때문에 당장 학교 등의 폐쇄가 시급하다"고 답했다.
 
낸시 메소니에 미 질병통제센터 면역호흡기질환 국장. 2월 25일 브리핑에서 "미국 지역 사회 확산은 시간 문제"라고 한 뒤 뉴욕 다우지수가 3.6% 폭락했고 이후 브리핑에서 모습을 감췄다. [로이터=연합뉴스]

낸시 메소니에 미 질병통제센터 면역호흡기질환 국장. 2월 25일 브리핑에서 "미국 지역 사회 확산은 시간 문제"라고 한 뒤 뉴욕 다우지수가 3.6% 폭락했고 이후 브리핑에서 모습을 감췄다. [로이터=연합뉴스]

 
'붉은 여명' 전문가 그룹의 경고에 따라 2월 26일 저녁 트럼프 대통령의 인도 방문 귀국 날에 맞춰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을 도입하기 위한 회의가 잡혔지만 결국 취소됐다. 전날 2월 25일 낸시 메소니에 CDC 면역·호흡기질환 국장이 브리핑에서 "미국 지역사회 확산은 피할 수 없으며 시간 문제"라고 한 뒤 이틀간 뉴욕 증시가 폭락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귀국길 에어포스원 안에서 에이자 보건장관에 전화를 걸어 "메소니에 국장이 국민에게 불필요하게 겁을 줬다"며 격분했고 회의 자체가 취소됐다. 결국 "가급적 집에 머물고 식당·바·공공장소를 이용하지 말아라", "10명 이상 모이지 말라"는 백악관의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 발표는 3주가 지난 3월 16일에야 이뤄졌다. '붉은 여명' 전문가들이 1월부터 주장한 조기 폐쇄 조치는 증시 폭락 때문에 막힌 셈이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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