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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 당신의 표는 필요없다

중앙일보 2020.04.10 00:32 종합 28면 지면보기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달콤한 거짓말의 향연이다. 이번 총선에는 김구라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총선 투표 캠페인에 등장해 대놓고 구라(거짓말)를 친다. “내가 원하는 대표자를 뽑으러 (투표하러) 간다”고. 어디 김구라 뿐인가. 유재석이, 고아라가, 그리고 정해인이 “당신이 원하는 대한민국을 만들려면 꼭 투표하라”고 유혹한다.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웃는 얼굴로 속삭인다 해도 착각하지 마시라. 당신이 투표한다고 당신이 원하는 후보자가 꼭 당선되는 게 아니다. 당신이 투표한다고 당신이 원하는 대한민국을 꼭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아무리 박나래나 박해진이라도 표 한 장으로 “아이들과 노인이 행복한” 대한민국이나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는 없다. 언제는 아이와 노인이 불행하고 부모 찬스 없는 이에게만 불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투표했었나. 그럼에도 미래 세대는 뒷전으로 밀리고, 어김없이 노인 혐오가 기승을 부리고, 여기에다 공정의 가치는 ‘조국 사태’를 거치며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손상되지 않았나.
 

차악을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악의 정치꾼 떨어뜨리려면
무조건 투표소에 가야 한다

특히 이번 4·15 총선은 더욱 그러하다. 한 석이라도 더 나눠 먹겠다고 제1 야당을 배제한 채 해괴한 1+4라는 범여권 야합으로 탄생해 결국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이라는 초유의 꼼수를 낳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저주 탓이 크다. “무조건 내 편이 이겨야만 정의가 구현된다”며 “내 편만 투표하라”고 외치는 이번 선거에서는 진영 논리 외에 경제나 안보 이슈는 물론 다른 그 어떤 가치도 설 자리가 없다. 대신 진영 논리의 포로가 된 극성 지지자들의 표가 상식 있는 국민이라면 절대 원치 않을 함량 미달 국회의원을 대거 쏟아낼 가능성이 아주 크다.
 
과장도, 비약도 아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선거 때만 반짝 머리 숙이는 척이라도 했던 각 정당은 이번엔 이런 위선도 다 집어던지고 ‘내 편 아닌 당신의 표는 원치 않는다’는 속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정치공학적 셈법만 따져 이성이 마비된 채 내 편이면 범죄자라도 찍어주고 네 편이면 세종대왕이 나와도 표를 주지 않을 그런 지지자만 투표소에 나오길 원한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내 편 아닌 당신의 표는 필요 없다.’
 
내 편 결집을 위한 선전 도구로 전락한 선거공보물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여당의 제1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오로지 극성 친문 지지세력에만 기대겠다는 전략을 숨기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하는’이라는 수식어로 시작하는 선거공보물은 온통 문 대통령 사진과 이름뿐이다. 아예 세 번째 주요 정책이 ‘문재인 대통령을 끝까지 지키겠다’이고, ‘한 표라도 총결집해야 문재인 대통령이 이길 수 있다’고 오직 지지자를 향한 구애를 한다. 명색이 국정 파트너인 여당이 만든 비례정당인데 이쯤 되면 박근혜 사진으로만 호소하는 우리공화당이나 박근혜 사진에다 박정희·이승만 사진까지 들고나와 어떻게든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최소 3% 득표율을 얻겠다는 친박신당같은 시대착오적 소수 정당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부동산 투기 의혹에 막말 등으로 청와대 경력에도 불구하고 여당에서조차 공천 주기 부담스러워하는 셀럽끼리 모인 것으로도 모자라 ‘조국 수호’를 내세워 기어이 국회의원 배지 달겠다고 만든 열린민주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정책은 온데간데없고 문 대통령을 향한 저주만 퍼부으니 하는 말이다.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간다지만 군주제도 아닌 나라에서 “문재인을 지키려면, 박근혜를 복권하려면, 조국을 수호하려면, 문재인이 싫으면 투표소에 나오라”는 비례 정당이 즐비하니 차라리 “18세부터 일 인당 매월 150만원씩 국민배당금을 평생 주겠다”는 허경영 대표의 국가혁명배당금당 정책 공약이 더 제정신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혐오와 기권은 손쉬운 선택이다. 하지만 “내 표가 아깝다”며 투표하지 않으면 절대 뽑혀서는 안 될 무자격자들이 더 적은 표로도 얼마든지 당선될 수 있다. 최선 아닌 차악을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표가 필요 없다”는 오만하고 저질인 최악의 정치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도 투표장에 가야 한다는 얘기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지 않았기에 투표도 하지 않았다가 결국 말할 권리를 잃어버린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미국 소설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속 인용구로 맺을까 한다. ‘악마는 착한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승리한다.’ 당신이 혐오해서 표조차 주지 않았던 그 후보자가 힘센 국회에 들어가 얼마든지 당신의 삶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당신의 표는 그래서 꼭 필요하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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