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0%대 성장률도 낙관적…한은, 2차충격 대비해 금리인하 카드 아꼈다

중앙일보 2020.04.09 16:42
‘급한 불은 껐지만, 잔불 살아나면 다시 뛰어든다.’ 한국은행의 금리 동결 배경을 요약하면 이렇다. 당장 금융시장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지만, 상황이 나빠질 때에 대비해 쓸 카드를 남겨놓겠다는 의미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9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뉴스1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9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뉴스1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9일 전체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현 수준인 연 0.75%로 동결했다. 한은은 지난 3월 임시 금통위를 열어 기준금리를 1.25%에서 0.75%로 인하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이에 따른 경제적 충격을 방어하는 차원에서다. 약 3주 만에 다시 열린 금통위에서는 ‘동결’을 택했다.
 
금리를 낮추지 않은 건 현 상황을 낙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총재가 0%대 성장을 언급했을 정도로 경기 진단은 훨씬 심각해졌다. 금통위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는 “성장률 예상은 코로나19 전개 상황에 따라 대단히 가변적이지만 올해 1%대 성장률로 가기는 쉽지 않다고 보고 있다”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나리오를 전제로 말씀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총재가 언급한 시나리오는 코로나19가 2분기 이내에 진정돼 3분기부터 경제활동이 점차 개선되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현 단계에선 가장 현실적인 동시에, 가장 낙관적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도 0%대인 것이니 더 최악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다만 이 총재는 “플러스 성장은 하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밝혔다.
 

이주열 “1%대 성장률 쉽지 않다” 

실제로 최근 경제 흐름은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실물경제 위축이 현실화하면서다. 통계청에 따르면 2월 전(全)산업 생산지수는 전월보다 3.5% 감소했다. 9년 만에 최대 감소 폭이다. 강력한 이동 제한과 사회적 거리 두기, 외국인 관광객 감소가 내수 기반을 무너뜨렸다. 2월 소매판매액지수는 6% 감소했다. 역시 9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설비투자도 전월보다 4.8%나 감소했다.
 
수요가 출렁이니 생산량을 조절하거나 공장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위험이 제조업으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2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0.7%까지 떨어졌다. 금융위기 여파가 남았던 2009년 3월(69.9%) 이후 약 11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3월 제조업 업황 BSI는 56으로 전월 대비 9포인트 감소했다. 역시 2009년 3월 이후 최저치다. BSI는 기업의 체감경기를 알 수 있는 지표로 100이 넘으면 업황이 좋다고 응답한 기업이, 100보다 작으면 업황이 나쁘다는 기업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수출은 3월엔 소폭 감소(-0.2%)로 막았지만 4~5월은 더 나빠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코로나19 확진자 증가 속도가 줄었지만, 북미와 유럽 지역은 아직 정점을 판단하기 어렵다. 미국과 EU만 해도 한국 수출의 25%를 차지한다. 이 총재는 “전 세계 모든 나라가 겪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위기보다 훨씬 더 충격의 강도가 셀 것”이라며 “글로벌 경기 침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이런 전방위적 경제 충격은 사실상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1980년 2차 오일쇼크(-1.6%), 외환위기(-5.1%) 이후 역대 세 번째 마이너스 성장을 각오해야 한다는 분석까지 나오는 배경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코로나19가 예상보다 빨리 잡힌다고 해도 이미 내상이 작지 않다”며 “공장이야 다시 돌리면 되지만 서비스업의 광범위한 피해를 복구하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오일쇼크·외환위기 이후 세 번째 마이너스 성장 전망도 

다행히 3월 기준금리 인하,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한국판 양적 완화’인 환매조건부채권(RP) 무제한 매입 등이 효과를 나타내면서 금융시장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모습이다. 회사채나 기업어음(CP) 같은 단기금융시장의 불안감은 여전하지만, 긴급한 수준은 아니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한은 관계자는 “혹시 모를 2차 충격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금리 인하 여력을 남겨둬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당장 한은이 금리를 낮추기보다는 유동성이 부족한 곳에 자금을 공급하는 데 집중할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실제로 이 총재는 이날 국채 매입 확대, 비은행 금융기관 특별대출 등을 언급하며 상황에 맞춰 대응해 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이 총재는 “Fed처럼 특수목적법인을 정부 보증하에 설립하는 것은 상당히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필요하면 한은이 회사채 직접 매입에 나서는 것도 마다치 않겠다는 뜻이다. 현재 구조상 한은이 회사채나 CP를 직접 살 순 없다.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처럼 정부가 출자하는 특수목적법인(SPV)에 자금을 제공해 회사채·CP를 매입하는 우회로가 있다. 정부가 보증하는 형태다.  
9일 한국은행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가 YouTube로 중계되고 있다. 한국은행

9일 한국은행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가 YouTube로 중계되고 있다. 한국은행

한은의 회사채 직접 매입에 대해선 반론도 작지 않다. 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한시적 지원이라는 타이틀이 붙지만, 근본적으로 금융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건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다”라며 “회수 시점에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나타났을 때 정치적 판단으로 묵인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통화정책이든 재정이든 효율적인 집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준경 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은행이 규제와 신용등급 틀을 벗어나면서까지 대출에 나설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재정이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기업 규모를 따지지 말고, 급한 기업에 더 빨리 자금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원석·정용환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