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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 성추행 무죄확정난 교감···'성인지감수성' 왜 외면당했나

중앙일보 2020.04.09 12:02
성추행 혐의를 받았던 초등학교 교감 B씨의 무죄가 9일 확정됐다. 피해아동 부모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올린 유죄 청원. [청와대 청원게시판 캡처]

성추행 혐의를 받았던 초등학교 교감 B씨의 무죄가 9일 확정됐다. 피해아동 부모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올린 유죄 청원. [청와대 청원게시판 캡처]

성인지감수성을 고려해도 자신을 성추행 피해자라 주장하는 초등학생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면 피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대법 "초등생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부족"

9일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2015년 당시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10세 여학생 A양을 상습 성추행한 혐의를 받은 초등학교 전직 교감 B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이로써 B씨는 2019년부터 시작된 1·2·3심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다. 검찰은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라며 B씨에게 5년형을 구형했었다. 항소심에선 피해 아동이 "죽을 힘을 다해 큰 용기를 내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직접 법정에서 증언도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성인지감수성을 토대로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 사정을 감안해도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피해자의 부모가 청와대 청원까지 올리며 B씨의 유죄를 주장했던 사건이다. 대법원은 왜 이런 판결을 하게 된 것일까 
 
피해 아동이 작성한 메모들. 뱀그림 등이 그려져 있다. [피해아동 가족측 제공]

피해 아동이 작성한 메모들. 뱀그림 등이 그려져 있다. [피해아동 가족측 제공]

법원은 왜 교감에게 무죄를 선고했나 

공소사실에 따르면 B씨는 2015년 학교폭력 피해를 상담하는 과정에서 A양의 손을 잡거나 학교 운동장 부근에선 피해자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가슴 부위를 쓰다듬고 엉덩이를 움켜잡은 강제추행 혐의를 받았다. 피해 아동의 부모는 A양의 일기장과 알림장, 메모 등에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A양은 법원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B씨를 "내 온몸을 마구마구 성추행하고 더럽게 만든 나쁜 뱀 교감"이라 주장했다. 증거는 진술뿐이었지만 검찰은 A양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된다고 판단해 B씨를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피해 아동과 부모의 진술 ▶피의자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의 진술 ▶피해 아이가 제출한 알림장과 녹취 등을 고려할 때 사실상 모든 증거와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법원이 인정한 유일한 사실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손을 잡고 어깨를 토닥였다"는 동료 교사의 진술 뿐이다. 
 

피해자 진술 조목조목 따진 법원  

대법원이 확정한 원심 판결문에 따르면 법원은 A양이 피해 일시와 횟수, 추행 부위, 추행 방법에 대해 진술을 번복한 사실에 주목했다. 2심 재판장은 "그 변경 경위에 피해자 모친의 영향이 상당 부분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다. 법원은 또한 피해 아동이 "항상 수업시간에 교감선생님이 자신을 불렀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다른 교사들의 진술도 주목했다. 교사들은 "피고인이 피해자와 쉬는 시간에만 상담했다""어떠한 신체적 접촉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법원은 교사들이 왕래하고 학생들이 다니는 등굣길과 운동장 등 개방된 장소에서 B교감이 A양의 주장처럼 A양을 수십차례 성추행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법원은 A양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뒤 복지센터와 교육지원청에서 학교폭력 관련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성추행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점도 지적했다. A양은 "피고인이 자신을 납치하고 엄마를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라며 뒤늦게 진술한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법원은 피고인이 A양에게 그런 위협을 하지 않았다고 봤다. 법원은 피해사실이 적힌 알림장과 녹음 파일의 작성 시기가 명확하지 않아 사후에 작성됐을 가능성도 의심했다.
 
지난 2월, 성추행 혐의를 받는 교감의 유죄 판결을 요구하며 피해아동의 부모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대법원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석경민 기자

지난 2월, 성추행 혐의를 받는 교감의 유죄 판결을 요구하며 피해아동의 부모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대법원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석경민 기자

A양 부모 "아이, 성폭력 트라우마 시달려" 

법원이 성인지감수성을 고려하면서도 피해자의 진술을 배척하며 강제추행 혐의를 받는 피고인에게 1·2·3심 모두 무죄를 선고한 것은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법조계에선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부실했다고도 지적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진술만 믿고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피해자의 부모는 지난 2월 B씨의 유죄를 주장하며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성적이 늘 우수하고 재능이 많았던 우리 아이가 꿈도 희망도 잃어버리고 성폭력 트라우마에서 살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A양이 당시는 성추행 사실을 도저히 알릴 수 없다고도 했다.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도 "판결을 절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의 판단으로 B씨의 무죄를 되돌리긴 어려워졌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성인지 감수성이란
성인지 감수성이란 사회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성차별적 요소를 찾아내는 민감성을 뜻한다. 법정에서는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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