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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유통" 장영자의 추락…네번째 유죄 확정, 33년 옥살이

중앙일보 2020.04.09 10:39
1994년 1월 24일 당시 장영자씨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서울 구치소로 가기위해 서울지검 직원에 둘러싸여 검찰청사를 나서고 있다. 장씨는 검사가 구속을 통보하자 충격을 받아 한때 실신했었다. [중앙포토]

1994년 1월 24일 당시 장영자씨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서울 구치소로 가기위해 서울지검 직원에 둘러싸여 검찰청사를 나서고 있다. 장씨는 검사가 구속을 통보하자 충격을 받아 한때 실신했었다. [중앙포토]

전두환 정권을 흔들었던 '큰 손' 장영자의 네 번째 유죄가 확정됐다. 혐의는 사기, 징역은 4년이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9일 무죄를 주장한 장씨의 상고를 기각했다. 장씨는 지인들에게서 세 차례에 걸쳐 6억여원을 가로채고 이들에게 위조 수표로 수억원을 요구한 혐의를 받는다. 올해로 76세를 맞은 장씨는 이미 복역을 마친 29년을 포함해 인생의 절반가량인 33년을 감옥에서 보내게됐다. 
 

대법원, 장영자 네번째 사기 징역 4년형 확정

우수한 인재에게만 허락된다는 숙명여대 '5월의 여왕(메이퀸)' 출신인 장영자의 노년이 씁쓸하다. 장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 고(故) 이규광씨의 처제이자,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고(故) 이철희씨의 아내였다.
 

전두환 정권 흔든 장영자의 삶

장씨의 앞선 범행과 비교해 네 번째 사기 액수는 그 규모가 상당히 줄어든 편이다. 장씨는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남편을 내세워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기업에 자금을 빌려준 뒤 몇 배에 달하는 어음을 할인 유통하며 이득을 챙겼다. 그 규모가 총 7111억원에 달했다. 장씨는 이중 6404억원의 어음을 할인해 사용했다. 
 
2000년 5월 19일 세번째 사기 혐의로구속영장이 청구된 장영자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법 서부지원으로 들어가는 모습. 장씨는 이 사기 혐의로 감옥에서 15년을 살았다. [중앙포토]

2000년 5월 19일 세번째 사기 혐의로구속영장이 청구된 장영자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법 서부지원으로 들어가는 모습. 장씨는 이 사기 혐의로 감옥에서 15년을 살았다. [중앙포토]

실체가 없던 어음은 부도가 났고 기업들은 도산했다. 장씨는 이 첫 번째 사기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0년만인 1992년에 가석방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는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이를 "조금씩 민심도 안정되고 경제도 생기를 되찾아 (남편이) 자신감을 얻던 시점에 날벼락같이 찾아온 횡액과도 같은 사건"이라 회고했다.
 
장씨가 당시 법정에서 아직 시중에 유통중인 어음이 있다며 "경제는 유통""나는 권력투쟁의 희생양이라"이라 했던 말은 유행어가 됐다. '장영자 어음할인 사건' 수사 축소 의혹으로 두 명의 법무부 장관이 경질됐다. 
 

"누나 성질 급하다" 70대 장영자의 돈 요구

장씨는 출소한지 2년만인 1994년에 140억원대 차용 사기를 저질렀다. 두 번째 사기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장씨는 1998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하지만 2년만인 2000년 220억원대 구권화폐 사기로 또다시 구속돼 15년형을 받았다. 그게 세 번째 사기다. 이날 확정이 된 장씨의 네 번째 사기는 2015년 1월 출소하고 7개월 만에 저지른 범행이다. 장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1·2심 재판장은 "장씨가 동종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고 누범기간 중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어음 사기 사건'으로 구속됐던 장영자 씨가 사기혐의로 네번째로 구속돼 지난해 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전두환 정권 당시 '어음 사기 사건'으로 구속됐던 장영자 씨가 사기혐의로 네번째로 구속돼 지난해 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장씨의 네 번째 사기 혐의에 대한 1·2심 판결문에는 장씨가 지인들에게 "남편 명의의 삼성전자 주식을 현금화해 유명 스님에게 절을 지어드려야 한다"거나 "문화재단을 만드는데 현금이 필요하다""브루나이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며 돈을 뜯은 수법이 자세히 담겨있다. 위조 수표를 건네면서 수억원의 돈을 요구하며 "이 누나 성질 급한 거 아직 모르시제"라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돈을 독촉하는 장면도 있다. 
 
장씨는 지난해 9월 항소심 법정에 출석해 검사가 발언할 때 "거짓말"이라 언성을 높이거나 재판장에겐 "순진하신 생각"이라 말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나이가 무색할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장씨는『법을 고발한다』는 제목의 자서전 출고 계획이 있다며 재판을 미뤄달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1·2심 법원은 "장씨의 유죄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제출됐다"며 4년형을 선고했다. 장씨의 자서전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1994년 1월 당시 이철희ㆍ장영자 부부 어음사기사건 전모를 발표하는 검찰. 오른쪽에 앉은 검사가 다시 수사를 맡았던 정홍원 전 국무총리다. [중앙포토]

1994년 1월 당시 이철희ㆍ장영자 부부 어음사기사건 전모를 발표하는 검찰. 오른쪽에 앉은 검사가 다시 수사를 맡았던 정홍원 전 국무총리다. [중앙포토]

장영자 수사한 정홍원과 박주선 

장씨의 첫 번째 사기를 수사했던 정홍원 전 국무총리는 회고록 『운명과 경주를 한 정홍원 스토리』에서 장씨에 대해 "내가 만난 장영자라는 여인은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세상 물정을 전혀 몰랐다"고 썼다. 정 전 총리는 수사 중 장씨에게 "검사 월급(당시 50만원)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장씨가 "한 1000만원은 되지 않겠냐"고 말해 기가 찼다고 했다. 장씨는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금액에 최소 '0'하나는 더 붙였다고 한다. 
 
정 전 총리와 함께 장씨의 수사검사였던 박주선 민생당 의원은 2018년 장씨가 네 번째 사기 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알려진 뒤 중앙일보에 이런 말을 전했었다. "2016년쯤에 전화가 왔어요. 한번 보고 싶다고, 또 사기로 구속됐어요? 머리가 참 좋았는데. 안타깝네, 안타까워."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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