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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우린 괜찮을 것’ 자만하다 속수무책으로 방역망 뚫려

중앙일보 2020.04.09 00:30 종합 24면 지면보기

코로나 사태로 드러난 서방 선진국의 민낯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미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최대 감염국이 됐다. 8일 현재 미국의 확진자 수는 약 40만명으로, 전 세계 감염자 셋 중 한 명이 미국인이다. 사망자는 1만2000명을 넘어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유럽국들 사정도 다르지 않다. 최근 며칠 새 확산세가 다소 둔화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제 하루 프랑스에서는 확진자가 1만1000명 늘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독일과 영국도 적게는 3000명에서 많게는 5000명대의 확진자 증가세를 보였다. 사망자가 가장 많은 10개국 중 8개국, 감염자가 가장 많은 10개국 중 7개국이 이른바 ‘서방 선진국’이다.
  

사망자 많은 10개국 중 8개국이
선진국이라 믿었던 미국과 유럽
서구의 편견과 오만, 리더십 부재
시스템의 처참한 실패 불러와

마스크·방호복 없이 사투 벌이는 의료진
 
4주째 이동금지령이 발효 중인 스페인의 중소도시 알칼라데에나레스의 텅 빈 거리를 무장 군인 3명이 순찰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이 전면금지돼 있다. [EPA=연합뉴스]

4주째 이동금지령이 발효 중인 스페인의 중소도시 알칼라데에나레스의 텅 빈 거리를 무장 군인 3명이 순찰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이 전면금지돼 있다. [EPA=연합뉴스]

지금 미국과 유럽의 상황은 선진국의 모습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의료진은 마스크와 방호복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목숨을 걸고 환자를 돌보고 있다. 마스크 하나로 일주일을 버티고, 인공호흡기 하나를 중증환자 여러 명이 나눠쓰는 곳도 있다. 뉴욕주의 장례 시설 수용 능력은 이미 포화 상태다. 냉동 트럭 80대를 동원하고도 모자라 공원 내 임시 가매장을 검토하고 있다. 집중치료병상(ICU)이 부족해 살릴 환자를 선별해야 하는 의사들은 윤리적 딜레마를 호소하고 있다.  
 
미국은 방역 물자와 의료 장비 조달을 위해 전시에 적용하는 국방물자법까지 소환했지만, 연방정부와 주정부, 민간과 정부 간 엇박자 탓에 생산에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선진국들끼리 안면 몰수하고 방역 물자 쟁탈전까지 벌이고 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으로 드러나고 있는 서방 선진국들의 민낯이다.
 
미국과 유럽의 실망스런 모습은 안일한 초기대응에 기인한다. 코로나19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사태 축소에 급급했던 중국과 세계보건기구(WHO) 책임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는 서방 선진국들의 리더십과 시스템 실패 탓이 크다. 그 근저에는 중국과 아시아에 대한 편견이 깔려 있다. 문화적 우월 의식에서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일 수도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하는 인수(人獸) 공통감염병은 중국이나 동남아처럼 ‘기이한’ 식문화를 즐기고, 위생 관념이 철저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역병이므로 서방 선진국들과는 무관하다는 편견과 오만이 처음부터 작용했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입국자들만 막으면 별 탈 없이 지나갈 것으로 방심했던 이유다. 지금 미국과 유럽국들은 오판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동양에 대한 오만한 편견이 근본 원인
 
바르셀로나의 한 장례식장 주차장에 관이 가득하다. [EPA=연합뉴스]

바르셀로나의 한 장례식장 주차장에 관이 가득하다. [EPA=연합뉴스]

중국이 나름의 방식으로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면서 다른 나라들에 시간을 벌어준 측면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 시간 동안 미국과 유럽국들이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다면 지금과 같은 참혹한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진단키트 개발과 선별진료소 설치, 감염원 추적과 격리 등 방역과 검역 체계를 점검하고, 필요한 의료 장비와 물자를 확보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헛되이 흘려보내고 말았다. 뒤늦게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남 탓을 하며 통제와 봉쇄, 집단 면역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피해를 눈덩이처럼 키웠다.
 
공중보건과 공공의료 시스템은 선진국의 중요한 조건이다. 이번 사태는 서방 선진국들의 보건·의료 시스템의 부실함과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재정 위기를 겪은 유럽국들은 긴축 재정을 이유로, 미국은 미국대로 작은 정부를 이유로 관련 예산을 계속 줄여 왔다. 예산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의 공공의료기관들은 방역과 의료에 필요한 용품과 장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필요할 때마다 글로벌 분업체계를 통해 조달하는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 방식으로 대처해 왔다. 소화기와 소방차 없이 소방서를 운영해온 꼴이다. 코로나 사태로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멈추자 서방 선진국 의료 시스템도 덩달아 멈췄다.
  
실망스런 공공의료 시스템과 시민의식
 
세계 10대 코로나19 감염국

세계 10대 코로나19 감염국

서방 선진국들의 실망스런 민낯은 그뿐만이 아니다.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 팩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마트에서 육탄전을 벌이고, 진열대가 텅 빌 정도로 싹쓸이하는 장면은 선진국과는 거리가 먼 낯선 모습이었다. 외출 자제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당부하는 정부의 호소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잘 따라줬다면 강제력을 동원해 국가가 거의 모든 이동과 영업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록다운(lockdown)’ 사태까지 안 갔을지 모른다. 개인의 자유에 집착하다 가택연금을 자초한 꼴이다.
 
“우리는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호언은 뻔뻔한 헛소리로 드러났다. “독감처럼 다수가 앓고 나면 사라질 것”이라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코로나19에 걸려 집중치료병상에 누워 있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이 발등의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한숨 돌린 중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코로나 외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소프트 파워를 갖춘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려는 속셈이다.
  
코로나 사태로 선진국 기준 달라질 수도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분명하다. 그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과 파워는 코로나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글로벌 공급 체인이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도 중국은 수퍼파워로 계속 부상할 수 있을까.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초강대국 지위로 올라설 가능성은 없을까. 코로나 사태에서 기능부전을 드러내고 있는 유럽연합(EU)은 코로나 이후에도 존속할 수 있을까.  코로나 위기에서 비교적 선방하고 있는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동아시아 신흥 선진국 반열에 올라설 가능성은 없을까.
 
코로나 팬데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상대로 모든 나라가 함께 싸우는 3차 세계대전이다. 모든 나라에서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끝날 수 없는 전쟁이다. 전 세계가 힘을 합하고, 서로 도와야 끝낼 수 있다. 누가 잘했고, 못 했고를 따지는 것은 시기상조일뿐더러 의미도 없다. 그럼에도 전쟁 초반에 서방 선진국이 입은 참담한 피해는 두고두고 상처로 남을 것이다. 
 
세계 언론이 주목한 한국 시민의 방역 의식
중국은 공권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봉쇄와 통제, 주민 감시로 코로나19를 진압했다. 반면 한국은 국경 폐쇄나 지역 봉쇄, 이동 제한 없이 확산세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계 언론이 한국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평가하는 이유다.
 
특히 유럽 언론은 모든 활동이 사실상 금지된 유럽 상황과 경제 활동과 이동에 제약이 없는 한국 상황을 비교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유럽 언론은 방역 당국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처, 정부와 민간의 유기적 협력, 발전한 정보기술(IT) 환경 활용, 탄탄한 공중보건과 공공의료 인프라 등과 함께 한국의 시민의식에 주목했다.
 
프랑스 최대 민영 TV인 TF1은 지난달 말 한국의 코로나19 대응 사례를 소개하는 심층 리포트에서 위생수칙을 잘 지키고, 자발적으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을 발휘하고, 사재기를 하지 않는 한국의 시민들이야말로 방역의 일등공신이라고 평가했다. 218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한 이 보도에는 2300개의 ‘좋아요’와 1400개의 댓글이 달렸다. 댓글을 분석한 한인 유튜버 엘로디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규율(discipline), 본보기(exemple), ‘잘한다(Bravo)’ 등으로, 한국은 이제 프랑스가 본받아야 할 선진국이라는 댓글도 많았다고 전했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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