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호모 딜리버리

중앙일보 2020.04.09 00:17 종합 25면 지면보기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우리는 지금 혁명 중이다. 혁명의 이름은 코로나19. 우리가 원했던 건 아니다. 바이러스가 가져온 급격한 변화다. 대면 접촉을 피하기 위해 재택근무가 활성화됐다. 대학교는 물론 초·중·고교에 이르기까지 온라인 강의가 전격 도입됐다. 평소 같으면 이런 수준의 급격한 교육 방법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대형 마트나 시장을 피하기 위해 집에 앉아서 생필품을 주문한다.
 

세계 최고 IT기술과 촘촘한 배달망
코로나19 위기 속에 위력 발휘해
사회 구성원 사이 신뢰도 큰 역할
안전 지키되 기본권 침해없어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은 두 가지 인프라 덕분이다. 첫째는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IT) 기술이다. 어딜 가든 초스피드로 펑펑 터지는 세계 최고의 인터넷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재택근무를 할 수 있고, 손쉽게 인강(인터넷강의)을 들을 수 있다. 둘째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물품 배달망이다. 우리는 이런 배달 인프라 덕분에 언제든 생필품 주문을 할 수 있다. 수도권에 1000만명이 넘는 인구가 다닥다닥 붙어사는 게 역설적으로 득이 됐다. 휴지나 라면·쌀 등 생필품 사재기를 하는 건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수도권에선 오늘 밤에 물건을 시키면 내일 아침 집 현관 앞까지 배달을 해준다. 새벽배송·총알배송이 있는데 구태여 물건을 사재기할 필요가 있는가. 바야흐로 ‘호모 딜리버리’의 시대다.
 
그런데 이 정보통신 기술과 배달망이 위력을 발하기 위해선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바로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뢰다. 커피숍에서 노트북을 켜놓은 채 화장실에 다녀와도 아무도 내 물건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믿음, 집 앞에 물건을 던져놓아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는 믿음이 없다면 세계 최고의 IT 기술도, 촘촘한 배달망도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소문 포럼 4/9

서소문 포럼 4/9

『사피엔스』로 널리 알려진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에 칼럼(The world after coronavirus)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세계 각국의 대처 방법을 소개했다. 하라리에 따르면 전염병과 전쟁을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국경을 봉쇄하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그는 것이다.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쯤은 희생해도 된다. 또 다른 방법은 국제 사회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 전염병에 대한 정보와 치료 방법을 공유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에 대한 통제보다는 시민들이 스스로 개인위생을 철저히 지키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하라리는 중국과 이스라엘·필리핀이 전자의 경우라면 한국과 대만·싱가포르 등이 후자의 방법을 선택한 경우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도시 전체를 봉쇄하는 강력한 정책을 폈다. 개인의 자유나 권리는 건강상의 안전을 이유로 침해해도 무방하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자가격리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총으로 쏴 죽여도 좋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시민의 권리 따위는 없다. 한국은 최고 기술을 갖춘 의료진을 앞세워 바이러스를 찾아내기 위한 신속한 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시민의 자율권을 존중한다. 그런데 시민 자율권(citizen empowerment)이란 개개인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아파트 앞에 물건을 던져놔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 총으로 위협하지 않아도 스스로 손을 깨끗이 씻을 것이란 믿음 덕분에 시민 자율권이 생겨나는 것이다. 자가 격리자의 무단이탈을 막기 위해 전자 팔찌를 채우겠다는 생각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본다. 서로를 믿는 성숙한 시민의식의 기반 위에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 기술과 촘촘한 배달망이 결합하면서 우리는 또 다른 시민혁명을 이뤄내고 있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뢰는 돈으로 당장 구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와이파이(WIFI)망과 배달 인프라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와의 전쟁은 역설적으로 한국이 하이퍼커넥트 사회로 변신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큰 희생을 강요한다. 전 세계에 걸쳐 벌써 7만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예술 공연이 잇달아 중단되고, 전 세계 스포츠가 올스톱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코로나 전쟁은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20여 년 전 외환 위기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날이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라리는 말한다. “폭풍은 지나갈 것이고 대부분의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로나 이후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