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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속 독립영화 '바람의 언덕' 생존법…위로가 필요한 분 찾아갑니다

중앙일보 2020.04.08 14:07
영화 '바람의 언덕'. 오는 23일 극장 개봉에 앞서 지난해 말부터 지역에 찾아가는 공동체 상영으로 관객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사진 영화사 삼순]

영화 '바람의 언덕'. 오는 23일 극장 개봉에 앞서 지난해 말부터 지역에 찾아가는 공동체 상영으로 관객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사진 영화사 삼순]

“영화 하나 보고 같이 얘기하는 것만큼 쉬운 게 어딨겠어요. 그 무대 안에서 지금까지 주인공은 언제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었단 말이에요. 그 무대가 (관객과) 서로 마주하는 테이블로 변화한다면, 문화가 인생과 연결돼서 마음을 넓힐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영화 ‘바람의 언덕’으로 전국 각지 관객을 찾아가는 유랑 상영에 도전한 박석영(47) 감독의 말이다. 오는 23일 극장 개봉에 앞서, 이미 지난해 10월부터 광주‧태백‧서울‧진주‧제주 등 10여 곳 지역 공동체와 영화를 보고 가슴속 이야기를 나눠왔다. 일명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공동체 상영에 순회 개념을 더한 새로운 형태의 배급 방식이다.  

'기생충' 지하남 발굴한 독립영화
'재꽃' 3부작 만든 박석영 감독
새 영화 '바람의 언덕' 찾아가는 상영
"관객과 진하게 만나 삶 나눴죠"

 

관객과 더 진하게 영화 나누려고

영화 '바람의 언덕'이 지난해 12월 진주 시민미디어센터 공동체 상영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에 나선 모습이다. 왼쪽부터 박석영 감독, 주연 배우 김태희. [사진 영화사 삼순]

영화 '바람의 언덕'이 지난해 12월 진주 시민미디어센터 공동체 상영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에 나선 모습이다. 왼쪽부터 박석영 감독, 주연 배우 김태희. [사진 영화사 삼순]

관람료는 전액 공동체에 환원했다. 영화진흥위원회 개봉지원금을 홍보‧마케팅 대신 순회 상영 여비로 쓰며 간신히 돈은 잃지 않은 정도다. 이런 시도를 자처한 건 “관객 한 분, 한 분과 더 진하게 영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개봉 전의 신작이 전국적인 공동체 상영에 나선 건 이례적이다. 
 
지난달 25일 서울에서 만난 박 감독은 지난해 ‘바람의 언덕’이 초청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전작 ‘재꽃’을 ‘리퀘스트 시네마(관객이 투표로 상영작을 선정하는 섹션)’로 선보인 게 계기였다고 했다. 당시 “너무 감동적이었다”면서 “이 영화를 보려고 투표해서 모인 분들이잖나. 대화의 깊이가 달랐다”고 돌이켰다. 이번 영화도 상영하는 공동체 성격, 세대마다 반응이 달라 흥미로웠단다. 
 

'기생충' 지하남 발굴한 그 영화 

가출 소녀들의 길 위의 삶을 그린 독립영화 ‘꽃’ 3부작(‘들꽃’(2015) ‘스틸 플라워’(2016) ‘재꽃’(2017))이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이름난 그다. 봉준호 감독이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가 많다”고 호평하며 ‘기생충’의 지하남 배우 박명훈을 발탁한 영화가 그 중 ‘재꽃’이었다.  
 
이번 ‘바람의 언덕’의 주인공은 외딴 도시 태백에서 재회한 외로운 모녀다. 새 출발을 위해 고향에 돌아간 영분(정은경)은 어릴 적 자신이 버린 딸 한희(장선)가 그곳에서 필라테스 강사로 산다는 걸 알게 된다. 한희는 엄마를 얼굴도 모르고 그리워해 왔다. 영분은 차마 엄마라곤 못 밝히고 딸의 수강생이 되어 주위를 맴돈다.  
 
“난 네가 미워. 너 때문에 난 훨훨 다 할 수 있었는데 못 했어.” 영화에서 영분은 한순간 딸에게 독하게 군다. 한희는 그런 엄마에게 “나는 안 미워. 한 번도 안 미웠어. 난 어떻게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한다. 이런 대사 하나하나에 관객은 저마다 반응했다. 그런 반응이 각자 삶과 연결됐다. 
 

어머니 관객 "나도 엄마의 삶 무섭다" 

고향 태백에 돌아가 어릴 적 자신이 버린 딸을 만난 주인공 영분(정은경). [사진 영화사 삼순]

고향 태백에 돌아가 어릴 적 자신이 버린 딸을 만난 주인공 영분(정은경). [사진 영화사 삼순]

“아주머님들은 나도 엄마지만 엄마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세요. 또 나는 딸이지만, 아들이지만,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는 관객도 있고요. 등장인물과 가까운 친구처럼 자기 인생을 나누는 것 같아요.” 박 감독의 말이다.  
 
“저 여자는 나쁘다, 어머니 자격이 없다고 가슴 아프게 던졌”던 광주의 한 어머니는 알고 보니 “홀로 자식을 힘들게 키워온 분이었”다. 부산영화제의 20대 남성 관객은 “나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아버지를 영화 속 한희처럼 미워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고 털어놨다.  
 
“파주 헤이리시네마에서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온 모자 관객도 기억에 남아요. 어머님이 영분의 ‘무섭다’란 대사를 두고, 자신도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엄마의 삶을 감당하는 것이 무섭고 지금도 여전히 나이든 여성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두려움이 있다고 했죠. 옆에 아들이 있는데도요.”
 

"사람은 그 나이대 진실 있다" 대사는 

영화 '바람의 언덕'에서 영분(정은경)과 얽히는 택시기사 윤식 역의 김준배 배우. [사진 영화사 삼순]

영화 '바람의 언덕'에서 영분(정은경)과 얽히는 택시기사 윤식 역의 김준배 배우. [사진 영화사 삼순]

영화엔 만든 이들의 삶도 녹아들었다. “사람은 다 그 나이대의 진실이 있다”는 대사는 극 중 택시기사 윤식을 연기한 배우 김준배가 박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 실제 했던 말이다. 진주시민미디어센터 상영 때 딸 둔 어머니 관객들은 “그 대사가 나를 위로했다”고 했다. 한희가 하는 필라테스 교습소는 배우 장선이 한때 겸업했던 경험이 극중 직업으로 이어졌다. 
 
영화에서 영분이 한희 몰래 필라테스 광고지를 붙이러 다니는 장면은 박 감독 자신의 어머니한테서 따왔다. 아들 몰래 아들의 독립영화를 홍보하러 서울 곳곳에서 전단‧명함을 돌리곤 했단다. 
영화 '바람의 언덕'을 촬영한 매봉산 풍력발전소들이 늘어선 바람의 언덕. [사진 영화사 삼순]

영화 '바람의 언덕'을 촬영한 매봉산 풍력발전소들이 늘어선 바람의 언덕. [사진 영화사 삼순]

 
박 감독이 영화를 만든 계기가 바로 어머니였다. ‘재꽃’ 이후 준비하던 영화가 계속 엎어지고 괴로워하는 그를 보고 어머니는 붓던 보험금을 깨 와선 “자식과 부모가 볼 수 있는 영화를 찍어 달라” 했다. 순제작비 8000만원 중 2500만원을 투자한 ‘메인투자자’다. 이 영화의 제작‧배급사로 등록한 ‘영화사 삼순’도 박 감독이 어머니 이름에서 따왔다.
 

독립영화 "코로나의 시절 살고 있었다" 

영화에 대한 입소문이 피어나던 차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닥쳤다. 예정됐던 공동체 상영 다수가 연기됐다. 박 감독은 담담했다. 텅 빈 상영관이 “독립영화 감독들한테는 상존하고 있던 불안이다. 저희는 언제나 코로나의 시절을 살고 있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영화제에서 화제가 돼도 독립영화는 대부분 극장에서 10~30개 안팎 개봉관도 잡기가 어렵다.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간대에 딱 한 번 상영돼 수입이 0원인 날도 더러 있다. 
 
“개봉영화가 광고‧홍보에 2000만원을 쓰고 관객이 2000명 들었다면 한 분당 만 원짜리 티켓을 드린 셈이에요. 그런데 그 2000명은 모두 마주하지도 못하고 대화도 깊이 못 나누죠.”
 
마음을 다해 만든 영화가 혼자서 외롭게 틀어지게 두느니 적은 관객이라도 찾아가서 같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박 감독이 새로운 배급 방식을 고민한 이유다.  
  

패배자 아닌 배운 자 되기 위해 

영화 '바람의 언덕'에서 영분(정은경)이 자신이 엄마인 줄 모르는 딸 한희(장선)에게 필라테스를 배우러 간 모습이다. [사진 영화사 삼순]

영화 '바람의 언덕'에서 영분(정은경)이 자신이 엄마인 줄 모르는 딸 한희(장선)에게 필라테스를 배우러 간 모습이다. [사진 영화사 삼순]

박 감독은 “독립영화계 동료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게 자신의 영화 생명이 (극장에서) 2주 만에 끝난다는 것”이라며 “박살, 패배자로 다음 영화를 준비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처럼 하면 패배자가 아니라 배운 자로, 새롭게 많은 사람의 마음에 남은 자로 다음 영화를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개봉 전 전국 공동체 상영을 도는 게 정례화되면 모든 독립영화는 두 달 동안의 생명을 유예받고 관객들은 더 진하게 영화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번 체험을 책자·포럼 등으로 나누며 추후에도 기존 극장과 공동체 상영을 연결하는 등 관객과의 접점을 계속해서 고민해갈 작정이라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타인의 인생사를 들을 일이 많지 않잖아요. 영화가 사람들의 품속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나눈 것이 저한테도, 배우들한테도 성장 과정이죠. 다음 영화는 제주도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이 서로 뒤얽힌 형태에요. 이번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이 많은 사람의 각자 이야기를 담아낼 수 없었을 겁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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