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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인생 45년 양희경 “일기장에 쓸 거리 없는 하찮은 날이 소중한 날”

중앙일보 2020.04.08 11:30
최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난 배우 양희경. "평범한 날들이 진짜 특별한 날"이라는 깨달음을 자신이 연극 무대에서 들려준 대사를 통해 다시한번 전해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난 배우 양희경. "평범한 날들이 진짜 특별한 날"이라는 깨달음을 자신이 연극 무대에서 들려준 대사를 통해 다시한번 전해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내가 잘할 수 있고 재미있어 하는 일로 돈도 벌고 기쁨과 활기도 얻을 수 있으니 제일 행복한 삶 아닌가요.”
 
TV 드라마 속 익숙한 얼굴, 배우 양희경(66)은 자신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행복’을 이야기했다. 1975년 프로 무대에 데뷔, 45년을 이어온 배우의 삶이다. 최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난 그는 늘 ‘속사포’ 대사를 쏟아놓는 TV에서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차분하고 진지하고 담담했다.
 
그가 ‘내 인생의 명대사’로 꼽은 대사 역시 그의 분위기를 닮았다.
“살면서 사지육신 멀쩡하고 아무 일 없는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긴데, 그걸 모르고. 평범한 날들이 하찮은 날들인 줄 알고…. 느그 엄마가 쓰지 않은 그 수많은 일기장 속에는 그래, 소중한 평범한 날들이 많았기 때문인기라.” 
 
지난해 출연한 연극 ‘안녕, 말판씨’에서 그가 연기한 할머니 고애심이 손녀에게 했던 말이다. 선천성 희귀병 ‘말판씨 증후군(Marfan syndrome)’으로 딸을 잃고, 이제 또 손녀까지 잃게된 고애심은 장이 끊어지는 듯한 단장의 고통 속에서 평범한 날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는 “손녀가 ‘엄마  일기장이 왜 얇냐’고 물었을 때 한 말”이라며 “일기장에 쓸 거리가 없었던 ‘하찮은’ 날이 얼마나 감사하고 특별한 날인지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금 (코로나19 확산으로)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도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대사 아니냐”고 되물었다.
 
지난해 연극 '안녕, 말판씨'에서 양희경(오른쪽)은 욕쟁이 할머니 역을 맡아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전했다. 왼쪽은 '말판씨 증후군'을 앓는 손녀 역의 김채원. 걸그룹 에이프릴의 멤버다. [연합뉴스]

지난해 연극 '안녕, 말판씨'에서 양희경(오른쪽)은 욕쟁이 할머니 역을 맡아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전했다. 왼쪽은 '말판씨 증후군'을 앓는 손녀 역의 김채원. 걸그룹 에이프릴의 멤버다. [연합뉴스]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인 그는 연극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연기를 배운 대학 시절을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때”로 기억한다.
“아침 9시에 학교 가서 수업이 5시에 끝나면 밤 9시, 10시까지 연극 연습을 했어요. 삼성동에서 살 때였는데 집에 가는 버스가 없어요. 언니(가수 양희은)가 명동에서 통기타 치고 노래 부르다 끝나면 택시 타고 남산 드라마센터로 올라와요. 밖에서 ‘양희경’ 하고 부르면 연습 하다가도 내려와서 같이 차를 타고 집으로 갔죠.”
그는 50년이 다돼가는 옛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나이 먹도록 연기를 하면서 밥을 벌어먹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면서다.
 
연극으로 배우 데뷔를 했지만 주무대는 TV 드라마가 됐다. “두 아들을 낳아 키우며 연기하기에 촬영 일정이 규칙적인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가 좋아서”이기도 했다.  
‘목욕탕집 여자들’(1996), ‘넝굴째 굴러온 당신’(2012), ‘가족끼리 왜 이래’(2014) 등 숱한 히트작 속에서 그는 개성 넘친 연기를 보여줬다. 정확한 발음으로 빠르게 대사를 소화해해는 데 그는 특별한 장기가 있었다. 오는 17일 종영하는 KBS1 일일드라마 ‘꽃길만 걸어요’에서도 수상한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왕꼰닙 역을 맡아 꿋꿋하고도 애끓는 모정을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다.
 
드라마 캐스팅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시간만 맞으면 했다”는 그는 그 덕에 “거의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다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이 늘 천편일률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역은 양희경한테 맞아’ 식의 정해진 틀을 깨기가 굉장히 어렵다”며 “이모ㆍ고모ㆍ돌싱ㆍ노처녀ㆍ교수ㆍ의사ㆍ간호사 등 뭐를 맡든 항상 문제의 중심에 있고 파장을 일으켜 주변을 시끄럽게 만드는 역할들을 쭉 했다”고 말했다. “배우는 뽑는 사람이 아니라 뽑혀야 되는 사람이라, 주어지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그에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연기는 언제 해보지’란 아쉬움은 점점 커져갔다. 그 목마름을 채워준 건 다시 연극이었다. 1995년 1인극 ‘늙은 창녀의 노래’에 출연하면서 “아, 이제 평생 TV에서 똑같은 역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겠다”는 힘을 얻었다.  
“연극에선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주어지니까요. 내 자신이 지리하지 않게 활동할 수 있는 돌파구가 돼줬죠.  내겐 연극 무대가 본향 같아요. 거기서 충분히 엄마 밥 잘 먹고 잘 쉬고 그리고 또 생활전선(드라마)에 뛰어들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는 거죠.”
 
이후 매년 한 차례씩 꼭 무대에 서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꼭 지켜진 건 아니다. 건강 문제로 3년 동안 공연을 못한 적도 있고, 지난해엔 3편의 연극에 연이어 출연하기도 했다. 지난해초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로맹 가리 원작의 ‘자기 앞의 생’에서도 그는 ‘내 인생의 명대사’로 꼽을 만한 대사를 만났다.  
“‘나는 두려워, 그 뭐가 두려운지 잘 모르겠어’라는 유대인 보모 로자의 대사가 대본을 볼 때부터 가슴에 탁 와서 닿았어요. 뭔지 모를 불안함ㆍ두려움이 현대인의 삶에는 다 있지 않겠어요. 나 역시 건강에 대한 걱정ㆍ두려움이 늘 컸는데,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은 우리의 동맹군인데 그게 없으면 어떡하겠나 하셨지’란 대목이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는 “두려움이란 게 없었으면 좋겠지만 있다고 해서 무조건 우리한테 악이 되거나 해가 되는 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는 듯했다.
 
“건강이 허락하고 대본을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연기를 하겠다는 그는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나 배역은 없다고 ‘쿨’하게 대답했지만, 한가지 바람은 간절한 목소리로 전했다.  
“3월로 예정됐던 연극 ‘여자만세2’ 지방공연이 코로나 때문에 5월로 미뤄졌어요. 그때까진 꼭 잦아들어 공연할 수 있어야 될텐데요.”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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