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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포스트 코로나 희망사항

중앙일보 2020.04.08 00:22 종합 28면 지면보기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코로나 이후에 희망하는 것들
실력 있는 리더, 전문가, 국가
나눔의 가치와 소박한 일상

희망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뭐든 뚝딱 하고 만들어내는 요술 방망이가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희망 사항’을 노래하는 이유는 희망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패배자들의 정당화가 아니라 승리자들의 히든카드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과 공포로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는 코로나 시국에 우리가 불러야 할 희망 사항 가사는 운 좋게 우리만 살아남기를 바라는 내용이 될 수 없다.
 
‘손을 씻지 않아도 감염 안 되는 사람,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감염 안 되는 사람, 설사 감염되어도 거뜬히 일어서는 사람.’
 
이런 유의 희망 사항을 부르기에는 사태가 너무나도 엄중하다.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마저 무력해지는 이 상황에서 나만 감염되지 않기만을 바라는 희망 사항은 비현실적일 뿐이다.
 
우리가 부르고픈 희망 사항은 코로나 이후의 우리 삶에 대한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은 후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국가의 모습이 선명해지기를 희망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각 나라의 숨겨진 취약성들이 드러났다.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공공의료 시스템이 취약한 나라, 빈부 격차가 심한 나라, 투명성이 결여된 나라, 공동체 의식이 부족한 나라들이 그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국가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실력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국민을 위기로부터 지키는 실력을 갖추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리더의 모습이 선명해지기를 희망한다. 우월의식을 지니지 않은 리더, 자국민을 사랑하되 타국인을 차별하지 않는 리더, 가장 편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듣기보다 최고의 전문가에게 조언을 듣는 리더, 정파적 이해보다 사실과 증거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리더, 이런 리더가 등장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전문가의 모습이 선명해지기를 희망한다. 자기 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침묵하는 전문가, 꼭 한마디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는 전문가, 비판보다 대안을 제시하는 전문가, 더 나아가 대안을 실행으로 옮기는 전문가, 묵묵히 축적해온 데이터와 연구결과를 위기의 순간에 쓱 내미는 전문가, 이런 전문가들이 등장하기를 소망한다. 전문가를 감별하는 우리의 전문성도 깊어지기를 소망한다.
 
삶의 중요한 것들이 모두 측정되고 진단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러스 감염을 진단하고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듯이 우리 마음의 상태를 진단, 예방하고 치료하는 체계도 구축되기를 소망한다. 코로나 기간 동안 누가 더 아파하고 더 우울해하고 더 불행했는지를 체계적으로 측정하고 진단해서 위기에 강한 인간형의 모습이 제시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아이들을 어떤 존재로 키워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제시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일상이 선명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동안 너무 방만하지는 않았는지, 감각적 재미에만 중독된 나머지 홀로 있을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관행과 위계를 지키기 위해 회의를 남발하지 않았는지를 반성하고, 가족과 나누는 소박한 밥상에 만족하고, 과시적 모임을 경계하고, 실력과 체력을 기르는 실속 있는 일상을 소망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들이 분명해지기를 희망한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아무리 주장되더라도, 나누고 베푸는 연대와 우호의 가치가 최우선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윤 추구가 기업의 목적임을 알지만, 구성원과 사회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최우선 가치가 되기를 소망한다.
 
마스크를 남들보다 먼저 사기 위해, 화장지를 하나라도 더 사기 위해 서로를 밀치는 우리 안의 연약성을 인정하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드러나는 최악의 순간에도 품격을 지키는 법을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소망한다.
 
미래학자가 아닌 이상 인류의 삶이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라는 점 말고는 우리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경제학자가 아닌 이상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 말고는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자기 삶의 주체로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번 사태가 더 나은 개인, 더 나은 국가, 더 나은 인류 공동체가 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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