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홍병기 曰] 일상의 힘

중앙선데이 2020.04.04 00:24 680호 30면 지면보기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90년대 정부의 추곡 수매가를 결정하던 양곡유통위원회를 취재하던 당시 일이다. 어느 해던가 민간 시민단체 자격으로 참석한 소비자 단체 대표들이 쌀 수매가격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전까지만 해도 쌀 시장 개방 논란 속에서 시민단체들은 농민들과 함께 개방 압력에 맞섰던 ‘동지’로 꼽혔었다. 그런데도 굳은 이념이나 의리 대신 “더는 비싼 쌀을 살 수 없다”며 가격 논리를 들고나온 소비자들의 ‘반란’은 꽤나 충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달라질 한국 경제
사라진 소비자, 일상의 소중함 느낄 계기

최근 코로나 사태로 우리 경제가 엉망으로 무너지고 있다. 소비자들이 집에서 나오지 않고 지갑을 굳게 닫았다. 언제나 차고 넘칠 줄만 알았던 손님이 어느 순간 딱 끊기자 그동안 잘 몰랐던 ‘소비자’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멈춰 섰고, 북적대던 학교, 공연장, 운동장, 교회는 문을 닫았다.
 
탄탄한 렌터카 회사를 운영하며 항상 당당한 모습이었던 한 후배는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어제 온종일 5만원 벌었다”며 한숨부터 쉬었다. “한 달 이상 손님이 끊기면서 직원 월급을 고사하고 이젠 수도·전기요금도 못 낼 지경”이라 한탄했다. 졸업과 개학, 학교 급식 특수를 기대하면서 잔뜩 길러놨던 꽃이랑 채소 등 농작물들도 찾는 이가 없어 여기저기서 썩어 나간다. “당장 돈에 쪼들려 하루가 급한데 긴급자금 대출은 한 달 넘게 걸린다. 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느냐”며 “굶어 죽겠으니 제발 살려달라”는 하소연이 아우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 맛집 줄서기로 소문났던 동네 식당에 가면 오히려 예전보다 서비스가 좋아졌다는 ‘웃픈’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이 부활하고 있다.
 
우리가 여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런 상황은 소비자의 ‘실종’이 빚어낸 한국 경제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수요 급감, 공급 초과로 인해 판매자 시장(seller’s market)에서 구매자 시장(buyer’s market)으로 빠르게 바뀌면서 경제 현장의 풍경을 마구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제를 거부하는 고립과 불안감의 연속으로 소비가 마비되고, 여기에 타격을 받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다시 소비가 위축되는 악순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 많던 손님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배부르고 등 따시던 일상의 붕괴는 안일했던 우리 경제의 아슬아슬한 민얼굴을 드러내며 다가올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일상이 멈추고 소비자가 사라지자 예전에 미처 몰랐던 그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과 후(A.D.)로 연대를 구분했던 것처럼 이제 세계는 확연하게 달라지는 지구촌의 모습에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집 밖에서 돈을 안 쓰는 격리 경제(Quarantine economy), ‘큐코노미’가 본격화되는 데다, 혼밥으로 대표되는 솔로 산업과 접촉과 대면을 꺼리는 마스크 경제, 언택트(untact) 비즈니스의 시대로 급속도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악수란 원래 낯선 사람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요즘 악수 대신 등장한 주먹 인사(fist bump)가 마치 싸늘해진 소비자의 ‘재무장’ 선언처럼 보이는 건 지나친 상상일까.
 
생산자와 소비자 누구나 다 똑같은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다 똑같은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편하게 손님을 기다리던 시대는 지나가고, 몸을 앞으로 바싹 당겨 손님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기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우울한 3월(Blue March)이 가고 스프링처럼 튀어 오를 4월이다. 이제 달라질 세상이 바로 저기서 성큼 다가오고 있다.
 
홍병기 중앙CEO아카데미 원장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