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꼬부랑 할아버지의 ‘그승’ 이야기

중앙선데이 2020.04.04 00:20 680호 21면 지면보기
너 어디에서 왔니 한국인 이야기 - 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 한국인 이야기 - 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
한국인 이야기 - 탄생

우리는 어떻게 한국인이 ‘되었나’
팔순 지성의 문화유전자 해독기

태명·삼신할미·기저귀·포대기 등
한국식 육아의 생명존중 풀어내

이어령 지음
파람북
 
중국발 역병으로 인한 사상 초유의 지구촌 자가격리 시대. 느닷없는 혼자만의 ‘자기격리’ 시간을 깊은 성찰의 기회로 삼고 싶은 한국인이라면 팔순의 지성이 던지는 질문을 들어보자. “너 어디에서 왔니?”
 
“엄마 뱃속이요”라고 대답하면 딩동댕. 하여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들려주는 한국인 이야기의 시발점은 태중(胎中)이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는 한국인의 삶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기에.
 
30대에 출간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한국인을 놀라게 하고 40대에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써서 일본인을 놀라게 했던 그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주창한 ‘디지로그’, 생명이 가장 소중한 자본이라는 ‘생명자본주의’에 이어 그가 붙든 화두는 바로 ‘한국인’. 일흔일곱에 시작한 신문 연재물이 여든여덟인 올해 비로소 책이 되어 첫 권이 나왔다. 끝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헤치는 꼬부랑 할머니처럼, 저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 암호를 하나씩 풀어내 들려주는 꼬부랑 할아버지를 자처한다. “아직 사용하지 못한 한국인의 잠재력을 꺼내 우리 손자들이 연주할 수 있도록 ‘아하 그랬구나’ 체험을 주고 싶다”는 것이 저자의 기획의도다. 책상 위에 일곱 대의 컴퓨터를 동시에 켜 놓고 샅샅이 훑어낸 최신 정보까지 업데이트하느라 출간이 늦어졌지만, 그만큼 책이 실해졌다.
 
눈에 띄는 것은 편집 스타일이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라는 설명처럼 모두 12개의 고개로 구성돼 있는데, 본문은 짤막한 분량의 문단들을 숫자로 넘버링해 놓았다. 그냥 순서대로 읽어도 되고, 관심 분야로 바로 가고 싶다면 문단 밑에 적힌 다른 고개 문단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종이 위에 하이퍼 텍스트를 구현한 셈이다.
 
채용신의 1914년 작 ‘운낭자상(雲娘子像)’. 서양의 강압적인 육아법과 대조되는 한국 전통 육아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파람북]

채용신의 1914년 작 ‘운낭자상(雲娘子像)’. 서양의 강압적인 육아법과 대조되는 한국 전통 육아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파람북]

첫 에피소드는 뱃속 아기에게 지어주는 이름인 태명(胎名)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라는 설명이 우선 놀랍다. 까꿍이·쑥쑥이·튼튼이 같이 주로 의성어를 활용해 태명을 짓는 것이 2000년대 들어 본격화 됐고 이것이 드라마를 통해 세계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조만간 새로운 한류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예언한다.
 
“태명은 배 속에서 자라는 아이와 대화하고 소통하고 싶다는 모자 상호성의 욕망이자 그 흐름입니다. 태아에게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살아있는 이승도 죽고나서 가는 저승도 아닌 ‘그승’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게 되죠. 태명으로 인해 모자의 관계는 쌍방향으로 변하고, 가르치는 태교가 아닌 대화하고 소통하는 태담, 태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배냇저고리도 흥미롭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입히는 넉넉한 배냇옷은 새 천이 아닌 덕망있는 어르신이 입던 옷으로 짓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천을 통해 아기와 조상이 유대감을 나누던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는 아기가 태어나면 온 몸을 길다란 천으로 미라처럼 꽁꽁 묶어놓는 서양의 스와들링(Swaddling)과 대조된다. 장 자크 루소가 『에밀』에서 비판하기 전까지 보편적인 육아 문화였다는 스와들링은 아기들을 억압하고 특히 배설의 문제를 도외시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이는 다시 아기를 안고 또 업고 키운 우리의 포대기 문화로 이어지는데, 보기에 예쁘지 않고 불편하다고 한국 엄마들에게 외면받던 포대기가 외려 최근 서양 엄마들 사이에서 ‘Podaegi’라는 신상 아이템으로 각광받는 현실이 씁쓰레하다. 그는 “포대기의 ‘품는 문화’와 ‘업는 문화’는 아기에게 양수와 다름없는 따스한 환경”이라며 “서양 아기들이 요람에 누워 아무 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볼 때, 우리 아기들은 엄마 등에 업혀 세상을 보고 들었다. 어깨 너머로 배웠다”고 말한다.
 
언어학자다운 분석도 눈에 쏙 들어온다. 예를 들어 ‘떼다’라는 단어의 중요성이다. 탯줄을 가르고 배꼽을 뗀다. 젖을 떼고, 기저귀를 뗀다. 걸음마를 배워 첫 발을 뗀다. 그리고 천자문(요즘은 한글)을 뗀다. 저자는 “이를 차례대로 떼지 못하면, 평생 ‘떼’ 쓰는 응석받이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오줌 ‘싸는’ 아이가 오줌 ‘누는’ 아이가 되어야 기저귀를 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배설 본능을 참고 견디고 제어할 줄 하는 알아야 ‘사람’이 되는데, 여전히 감정을 ‘싸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지적으로 읽혔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와중에도 패거리로 나뉘어 막말을 ‘싸지르는’ 선거철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