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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예술 벗어나자” 공방교육 체계화시킨 칸딘스키

중앙선데이 2020.04.04 00:20 680호 22면 지면보기

바우하우스 이야기 〈32〉

1922년은 바우하우스의 내부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해였다. 그 중심에는 이텐과 그로피우스의 대립이 있었다. 문제는 ‘공방교육’이었다. 이텐은 생산과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공방교육’이 ‘예술의 가치’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공방교육을 통해 당시의 귀족적 예술아카데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우하우스 선생들의 공식명칭을 ‘마이스터(Meister)’로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로피우스 “예술·수공예 통합해야”
이튼 “예술 가치 손상시킨다” 반발
바우하우스 교육 주도권 다툼 치열

‘거물’ 칸딘스키가 중심 잡아 안정
재주꾼 마이스터 입성 황금기 돌입

마이스터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을 뜻한다. 노동자들의 구체적 삶과 유리된 예술은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그로피우스의 생각은 ‘11월 그룹’이나 ‘예술노동평의회’에 참여한 후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공방교육’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① 바실리 칸딘스키. 그가 공방 교육을 맡으며 바우하우스의 교육체계는 궤도에 오른다. ② 1920년 초빙된 오스카 슐레머가 맡은 목조공방.

① 바실리 칸딘스키. 그가 공방 교육을 맡으며 바우하우스의 교육체계는 궤도에 오른다. ② 1920년 초빙된 오스카 슐레머가 맡은 목조공방.

기존의 아카데미 예술가들은 노동자의 생산품과 자신들의 ‘고귀한’ 예술을 구별했다. 수공예와 예술이 분리되면서 예술가의 창조적 재능은 노동생산품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독일의 수공예품은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아주 허접한 물건으로 전락했다.
 
그로피우스에게 예술은 수공예뿐만 아니라 새롭게 성장하는 기계산업과도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계생산을 어떻게 교육과정에 수용할 것인가에 관한 생각은 구성주의적 예술관을 가진 두스부르흐의 도발이 있기 전까지는 구체화되지 않고 있었다.
 
수공예와 예술의 통합은 ‘공방교육’을 통해 실현가능했다. 이를 위해 그로피우스는 각각의 공방에 ‘형태마이스터’와 ‘공예마이스터’를 두기로 결정했다. ‘예술’과 ‘수공예’의 통합을 두 종류의 마이스터, 즉 예술을 지도하는 ‘형태마이스터’와 수공예를 지도하는 ‘공예마이스터’가 한 공방에 투입되는 방식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바로 벽에 부딪혔다.
 
두스부르흐도 그로피우스 비난
 
일단 재정상의 이유로 실습장비가 제대로 구현된 공방을 갖출 수 없었다. 또한 ‘형태마이스터’든 ‘공예마이스터’든, 공방에 적합한 인물을 찾기도 어려웠다. 급한 대로 독일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초빙해 ‘형태마이스터’를 맡겼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공이나 관심과는 상관없이 일단 필요한 공방에 배치되었다.
 
이텐은 그로피우스의 이같은 주먹구구식 공방교육 운영이 몹시 못마땅했다. 급기야 1921년 말 마이스터 회의에서 바우하우스의 교육프로그램, 특히 ‘공방교육’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다른 마이스터들도 이텐의 생각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이듬해 2월, 그로피우스는 반격에 나섰다. 마이스터들에게 긴 회람을 돌려 ‘공방교육’이야말로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단임을 천명했다. 이텐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전통적 예술관을 고집하는 한, 바우하우스에 그의 설자리가 없다는 것도 분명히 했다.
 
그로피우스의 가구공방에서 교육받은 마르셀 브로이어가 만든 ‘바실리체어’ [사진 윤광준]

그로피우스의 가구공방에서 교육받은 마르셀 브로이어가 만든 ‘바실리체어’ [사진 윤광준]

이텐과 그로피우스의 갈등은 1922년 내내 봉합되지 않고 계속됐다. 그 해 바우하우스 학생 작품전을 비롯해 튀링겐주 미술전 등 크고 작은 전시회가 개최되어 바우하우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 내용이 외부에 알려졌다. 사방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보수적인 예술아카데미와 관련된 이들의 비판은 예상된 바였다. 그러나 가장 뼈아픈 비판은 당시 바이마르에 머물고 있던 데 스틸의 두스부르흐로부터 나왔다.
 
그로피우스가 언제 자신을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로 초빙해줄까 노심초사하던 두스부르흐의 인내심은 금세 바닥났고, 그는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들에 제자를 시켜 바우하우스를 비판하거나 때로 가명으로 그로피우스를 비난했다(그는 다양한 가명으로 자신의 잡지에 자주 기고했다. 자신의 동조자가 많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의 혼자였다. 매번 너무 앞서 갔다). 전시회에서 드러난 바우하우스 학생이나 선생들의 작품에는 ‘건축 아래 모든 예술을 통합하겠다’는 바우하우스 창립선언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수공예로부터 건축으로 나아가려는 시도 또한 ‘낭만적 선언’에 그쳤고, 기계생산이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연결고리도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사실 그 때까지 바우하우스가 펼쳐놓은 작업의 결과는 비참한 수준이었다. 당시 바우하우스가 수주한 거의 유일한 ‘유료’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좀머펠트 하우스(Haus Sommerfeld)’ 건설(1922년 완공)은 그로피우스가 선언한 ‘모든 예술을 거느린 새로운 건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시대에 뒤처진 표현주의적 목조주택에 사람들은 몹시 실망했다.
 
1922년 그로피우스가 바이마르시의 설계공모에 응모해 얻어낸 ‘3월 희생자 기념비’ 또한 허무했다. 바이마르 중앙공동묘지에 위치한 ‘3월 희생자 기념비’는 1920년 우파 쿠데타에 맞서 바이마르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총파업 당시 사망한 9명을 기념하는 조형물이었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번개 모양의 이 조형물을 두스부르흐는 “철 지난 표현주의적 조형”이라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재정적 궁핍함을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스부르흐의 비판은 옳았다. ‘건축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이라는 바우하우스 이념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이론과 실천이 구체화된 ‘공방교육’이 가능한 빨리 자리잡아야 했다. 아울러 이를 반대하는 이텐의 독자적 행보를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로피우스는 ‘공방교육’을 맡을 ‘형태마이스터’들의 영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22년 6월, 바우하우스를 빛나게 할 엄청난 인물이 새로운 ‘형태마이스터’로 취임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다.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청기사파’라는 뮌헨의 아방가르드 예술그룹을 이끌었고, 혁명 이후 러시아 예술교육의 기초를 닦았던 칸딘스키의 합류는 지쳐가던 그로피우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노련하고 침착했다. 당시 55세였던 그는 바우하우스 마이스터들 중 최연장자였다. 칸딘스키 영입 이후, 그로피우스의 지향점에 의구심을 갖고 우왕좌왕하던 마이스터들도 차분해졌다.
 
이텐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공방교육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갖춰지며 자신이 이끌던 ‘예비과정’의 역할이 그야말로 ‘예비과정’에 머물게 되자, 조용히 지내다가 그 이듬해 취리히로 떠났다. 1922년 내내 그로피우스를 흔들어대던 두스부르흐 역시 더는 못 견디고 네덜란드로 돌아가 버렸다. 칸딘스키가 취임한 1922년 6월부터 1923년 여름의 대규모 ‘바우하우스 전시회’까지 바우하우스의 공방교육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먼저 와 있던 오래된 친구 파울 클레와 함께 ‘유리화 및 벽화공방’을 맡았다. 클레가 유리화공방을, 칸딘스키는 벽화공방을 지도했다. 그가 벽화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딘스키는 열과 성을 다해 벽화공방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텐의 색채이론과는 또 다른 방식의 칸딘스키만의 색채이론이 정리됐다. 클레는 유리화공방과 더불어 ‘제본공방’도 책임졌다.
 
바우하우스 초기부터 참여했던 마르크스(Gerhard Marks)와 파이닝거(Lyonel Feininger)는 각각 ‘도기공방’과 ‘인쇄공방’을 맡았다. 파이닝거의 인쇄공방에서는 바우하우스 선생과 학생의 작품을 인쇄해 판매했다. 당시 유럽 유명화가들의 판화집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재정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바우하우스의 홍보에 큰 기여를 했다. ‘목조 및 석조공방’은 1920년 클레와 함께 초빙된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가 맡았다.
 
가구·금속·인쇄공방 등 만들어 교육
 
1920년 초빙된 무헤(Georg Muche)는 ‘직물공방’을 맡았다. 직물과는 아무 관련 없었던 그는 주로 예비과정의 이텐을 보조했다. 직물공방의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해야 했다. 직물공방에는 주로 여학생들이 참여했는데, 그중 군타 슈퇼츨(Gunta Stölzl)은 아주 특별했다. 후에 그녀는 직물공방의 마이스터로 취임해 바우하우스의 직물관련 생산과 교육을 이끌었다.
 
‘가구공방’과 ‘금속공방’은 바우하우스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공방이었다. 기술적 수련과 더불어 생산 및 판매가 가장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로피우스는 ‘가구공방’을 직접 가르쳤다. 그 밑에서 바우하우스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바실리체어(Wassily-Chair)’를 만든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가 공부했다. 금속공방은 초기 이텐이 담당했지만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금속공방의 본격적 활동은 이텐의 후임으로 초빙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 Nagy)가 담당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이외에 전통적인 수공예 공방과는 거리가 먼 ‘무대공방’도 설치됐다. 이 이질적인 공방은 1921년 초빙된 로타 슈라이어가 담당했지만 곧 그만두고 오스카 슐레머가 맡았다. 이렇게 전설적인 마이스터들이 속속 공방교육을 책임지면서 내부 갈등은 진정되고 바우하우스의 짧은 황금시대가 시작됐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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