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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동독 사회주의 경제…신탁관리청이 ‘청산 해결사’로

중앙선데이 2020.04.04 00:20 680호 27면 지면보기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7〉

동독 시절인 1980년 부나화학콤비나트.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했던 이런 낡은 공업시설들은 민영화가 불가능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동독 시절인 1980년 부나화학콤비나트.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했던 이런 낡은 공업시설들은 민영화가 불가능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1990년 3월 동독에서 치러졌던 총선에서 가능한 한 신속한 통일을 목표로 삼았던 ‘독일을 위한 동맹’이 승리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이정표가 마련됐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던 이전에는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던 중요한 경제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됐다. 정치체제가 개방되고 투명해지면서 동독 국민경제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지게 됐기 때문이다.
 

기업 8500개, 사업장 4만5000개
슈타지·인민군 재산 등 관리 대상

초대 청장, 적군파에게 암살당해
민영화 작업 곳곳서 난관 부닥쳐

신탁관리청 성과 두고 평가 갈려
우리는 어떤 방식 택할지 불확실

동독은 파산 상태였다. 경제 전반에 만연한 문제를 비롯해 미약한 동기 부여, 만성적인 물자 부족으로 인해 일상이 된 긴 줄서기 등 사회주의의 구조적인 취약점들이 드러났다.
  
물자 부족 탓 긴 줄서기 등 만연
 
하지만 많은 서독 관계자는 동독이 산업 부문에서 꽤 성과를 거두고 있는 체제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실제로 동독 사회의 빗장이 풀리자 이러한 판단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십 년간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자본재들은 완전히 낙후돼 있었다. 전 산업 분야에 있어서 기술 또한 수십 년 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심각한 환경 문제도 대두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 소유의 사업장들과 사회주의의 재벌이라고 할 수 있는 대규모 콤비나트들을 어떻게 운용해야 했을까? 사회주의 정권의 말기에 이 주제에 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시민운동가들은 인민의 재산을 일종의 주식과 같은 형태로 인민들에게 직접 분배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후에 체코슬로바키아가 행했던 방식이다.
 
실직 걱정에 신탁관리청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튀링겐주 제철소 노동자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실직 걱정에 신탁관리청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튀링겐주 제철소 노동자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동독 민주 총선 이전인 1990년 3월 1일 한스 모드로우 총리가 이끌었던 동독의 마지막 사회주의 정권은 신탁관리청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신탁관리청은 인민 소유의 전 재산을 넘겨받아 공익 목적에 부합하게 처리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요직에 있던 다수의 관계자는 막대한 재산을 은닉하는 데 몰두했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이 소유하고 있던 90억 동독마르크 중 수억 마르크에 달하는 돈이 해외에 있는 공산당 동조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흐름을 밝히기 어려운 계좌로 흘러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2억9300만 서독마르크가 4만 명에 달하는 SED 간부 중 다수에게 대출됐다. 이 돈은 이들이 재산을 증식하기 위한 종잣돈으로 사용했다.
 
인민회의 자유 총선을 치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총선 이후 민영화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됐으며 이를 통해서만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90년 6월 17일 민영화와 인민재산 재편에 관한 법률(신탁관리법)이 제정됐다. 이에 따라 신탁관리청은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 됐다. 신탁관리청의 사업 범위에 포함되는 기업의 수는 8500개였으며 사업장 숫자는 총 4만5000여 개 그리고 근무 인력은 400만 명 이상이었다. 약 240만㏊의 부동산, 국가보위부(슈타지)가 보유했던 재산과 동독 인민군 소유의 부동산, 다수의 주택과 국영 약국 등도 신탁관리청의 관리 대상에 속했다.
 
130명의 직원으로 출범한 신탁관리청은 예전 동독 대외경제부 건물에서 업무를 시작했으나 신탁관리청의 활동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 맡은 과제가 동독경제 청산이었기 때문이다.
 
신탁관리청(아래 로고) 초대 청장인 데틀레프 카르스텐 로베더는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에게 암살당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신탁관리청(아래 로고) 초대 청장인 데틀레프 카르스텐 로베더는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에게 암살당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초대 청장을 맡았던 데틀레프 로베더는 제철기업인 회쉬 대표를 지낸 재계 출신의 노련한 인물이었지만 취임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적군파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고 만다. 로베더 초대 청장의 후임인 비르기트 브로이엘 청장은 그 이후 4년간 동독 경제의 광범위한 민영화 작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간단치 않았다. 처음에는 공정한 업무 수행을 위해 되도록 실물 재산을 이전 소유주에게 직접 돌려주려고 시도했지만 이는 생각한 것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탁관리청.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신탁관리청.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원소유주가 서독으로 이주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이미 사망한 이후였다. 이에 따라 상속인들이 관여하게 됨으로써 법률관계가 복잡해졌다. 게다가 부분적으로는 나치 시절에 몰수된 유대인들의 재산 처리 또한 간단치 않은 문제였으며 많은 경우에 새 거주민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해결 방법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법률상의 불확실성과 다툼의 소지가 매우 컸으며 이는 투자를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재산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해당 기업이나 토지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많은 기업은 경쟁력이 전혀 없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1990년 7월의 화폐 개혁 이후 서독마르크화로 화폐 통합이 이루어진 다음에 더욱 심해졌다. 동독의 기업들은 수십 년 동안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왔으며 환경이 바뀌면서 대량 해고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서 실업률은 급속하게 치솟았다.
 
신탁관리청이 업무를 시작했던 동독 대외경제부 건물. 베를린 중심가 빌헬름슈트라세와 니더키르히너 슈트라세에 접해 있는 이 건물은 현재 독일 연방 재무부가 사용하고 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신탁관리청이 업무를 시작했던 동독 대외경제부 건물. 베를린 중심가 빌헬름슈트라세와 니더키르히너 슈트라세에 접해 있는 이 건물은 현재 독일 연방 재무부가 사용하고 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동독의 경제 상황이 완전히 바닥이라는 사실은 동독 인민경제에 관한 실질적인 추산 작업을 시작하면서 드러나게 됐다. 사회주의 체제의 마지막 총리였던 모드로우는 토지를 제외한 동독 산업자산만의 가치를 1조4000억 동독마르크에 이른다고 밝혔다. 반면 신탁관리청 초대 청장이었던 로베더는 처음에 6000억 동독마르크로 내려 잡았다가 이후 첫 번째 보고서를 발표할 때에는 인민자산 가치의 결손 금액이 2000억 마르크라고 밝혔다.
 
호텔이나 식당 또는 작은 가게 등과 같은 소규모 업체들을 민영화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그러나 경영자 매수(MBO·Management-Buy-Out)를 통한 기업 민영화는 사전 회생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다. 신탁관리청이 활동했던 1990~94년 약 2만 개의 새로운 기업이 생겨났으며 2100억 마르크의 투자가 이루어졌고 150만 개의 일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신탁관리청이 한 일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다. 일각에서는 신탁관리청이 일관성 있게 수행했던 민영화 작업이 구동독의 많은 지역에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평가한다. 반면에 또 혹자는 그것이 독일이나 유럽연합(EU) 차원의 지원에 비하면 미미한 성과를 보였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한다.
  
구동독 SED 자금, 러시아로 새기도
 
비르기트 브로이엘 신탁관리청장(왼쪽에서 셋째)이 동독 지역에 대한 투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브로이엘 청장은 94년 신탁관리청이 문을 닫을 때까지 청장직을 수행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비르기트 브로이엘 신탁관리청장(왼쪽에서 셋째)이 동독 지역에 대한 투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브로이엘 청장은 94년 신탁관리청이 문을 닫을 때까지 청장직을 수행했다. [사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

또한 통일과정에서 구동독 SED 간부들을 중심으로 한 심각한 범법 행위가 자행됐는데, 스푸트닉 스캔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SED의 자금이 러시아로 흘러 들어갔던 사건이다. 프랑스 정유사인 엘프의 경영진이 민영화 과정에 참여할 목적으로 뒷돈을 준 로이나 스캔들 같은 새로운 투자와 관련해 발생했던 사건도 있었다.
 
농업 분야의 협동농장 자산 배분에 있어서도 이전 동독의 많은 간부가 혜택을 본 경우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여러 사건과 문제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독일이 인민자산에 대한 대규모 민영화 작업의 경험이 거의 없었음에도 신탁관리청을 설립해 수행했던 방식이 폴란드나 소련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인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더 지속적이고 공정하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건 분명하다. 에스토니아도 후에 이러한 독일의 사례를 따랐다.
 
독일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서독 측의 막대한 인력과 자금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통일 국면에 접어드는 시점에 한국이 어떤 방식을 택하게 될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하지만 완전히 피폐한 경제를 살려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입장에 봉착하게 되는 상황은 통일 당시의 독일과 매우 유사할 것이다.
 
※ 번역: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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