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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n번방’을 어둠 속 비밀로 방치하지 말자

중앙일보 2020.04.02 00:17 종합 29면 지면보기
조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

조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충격적이다. 3000개가 넘는 미성년자 및 일반인 성 착취 영상을 수십만 명의 유료 회원들에게 유포해 억대 수익을 올린 ‘박사’ 조주빈(25)이 검거되면서 n번방의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n번방 성범죄는 피해자들의 개인정보를 빼내 협박 수단으로 사용했고 유료 회원 등급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다. 조직범죄나 다름없다.
 

보안성을 역이용한 조직적 범죄
형사사법체계, AI 활용 진화해야

그러나 n번방 사건을 통해 한국사회가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갓갓·박사·와치맨 등 개인 운영자들의 수법이 아니다. 사이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법 성 착취 현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현실 세계의 대응이다. n번방 사건은 웹하드나 다크웹 등을 통한 사이버 성범죄가 보안성과 익명성이 보장된 텔레그램이란 채팅 앱을 이용해 더 은밀하게 체계적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미 2018년에 경찰은 영국과 미국의 수사기관과 공조해 충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다크웹 서버를 통해 수만 건의 아동 성 착취 영상을 전 세계 4000명 회원에게 가상화폐를 받고 거래한 20대 청년을 검거했다. ‘박사급’에 해당하는 두 얼굴의 사이버 성범죄자는 현실 공간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것이다.
 
불법 성 착취 영상을 유포하고 즐기는 무리의 범죄 행각을 보면 현실과 사이버 세계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느낀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채팅으로 접근해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처음에는 가벼운 요구에서 시작해 점점 더 수위가 높은 영상을 찍게 하는 과정은 그루밍(Grooming·길들이기) 성범죄 수법과 같다.
 
가해자는 더 자극적인 영상을 만들기 위해 피해자를 직접 찾아가 성폭행한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고, 대화방 회원들이 직접 피해자를 ‘노예’처럼 조종할 권한을 주기도 한다. 가해자의 요구를 들어준 것 때문에 자신이 덫에 갇힌 것을 깨달은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쥐고 있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에 괴로워하게 된다. 설령 호기심에 접근한 이용자라 하더라도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착각에 빠져 은밀한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인격 살인 현장을 즐기는 범죄에 동참하게 된다.
 
n번방 사건을 보면 사이버 세계의 미성년자 성 착취 범죄는 갈수록 지능화한다. 반면 우리나라 형사사법 체계는 아날로그 세계에 머물러 있다. 형사사법 체계는 사이버 성범죄 피해자가 생기는 과정과 피해자의 고통을 정확히 인식하고 온라인상에 불법 영상이 확인되는 즉시 삭제할 수 있는 법규를 만들어야 한다. 피해자가 스스로 찍어서 올린 영상이라도 유포하고 관전하고 내려받은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을 신속히 제정해야 한다. 불법 영상 유포자, 단순 소지자, 일회적 이용자, 상습 이용자를 구분해 처벌하는 법규를 마련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아동의 성적 영상물 단순소지·유포·제작 행위에 대해 최고 징역 6년을 선고할 수 있고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을 반영해 11개의 가중 요인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심지어 관련된 영상물의 개수에 따라서 처벌 수위를 달리할 만큼 법망이 촘촘하다.
 
사이버 공간 성범죄자를 더 효과적으로 검거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사기법을 고도화해야 한다. 인공지능(AI)을 접목해 불법 영상물을 탐지하는 기술을 발전시키자. 익명의 범죄자가 피해자를 유인하고 상호작용하는 대화를 분석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사이버 성범죄자 프로파일링을 정교화해야 한다. 나아가 함정수사가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
 
가상화폐 등을 추적해 범죄수익을 몰수할 수 있는 전문 기술 인력을 양성하고, 사이버범죄 국제 수사 공조 체계를 활용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형사사법 체계가 사이버 성범죄에 대응한다면 n번방 성범죄는 더는 어둠 속의 비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조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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