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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오래된 현재, 정지된 미래

중앙일보 2020.04.01 00:28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

후보 등록으로 본격적인 선거 운동에 돌입한 21대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야당 심판을 위해서도 여당 심판을 위해서도 아니다. 2020년에 치르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지난 3년이란 시간의 의미는 각기 다를 것이다. 여당엔 개혁의 시간이었을 것이고, 야당엔 혼돈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정치권도 저마다의 시간을 안고 2020년을 맞이했다.
 

거대 정당, 초라한 여성·청년 공천
‘중년 남성 기득권’ 깨고 새판 짜야

여성에게 지난 3년은 분노의 시간이었다. 2017년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의혹 폭로는 수많은 여성의 ‘미투(me too)’ 행렬로 이어졌다. 2018년 ‘불편한 용기’의 서울 혜화역 시위에는 경찰의 불법 촬영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성차별 행태를 규탄하기 위해 익명의 20~30대 여성 32만 명이 참여했다. 2019년 ‘장자연·김학의·버닝썬 사건’은 일상적으로 여성의 몸을 상품처럼 거래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폭로했다.
 
지난 3년 동안 여성들이 거리와 온라인, 그리고 광장에서 제기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여성 입법자가 필요하다. 여성들에게 21대 총선이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253명을 뽑는 지역구 선거에 등록한 후보 1118명 중 여성후보는 19%에 그쳤다. 더불어민주당 여성후보 12.6%, 미래통합당 10.9%다. 놀랍지도 않고 비난조차도 아깝다.
 
여성 국회의원이 1명이었던 70년 전에도 그랬고 17%인 20대 국회도 그랬다. 오래된 현재가 재현됐을 뿐이다. 다만 자칭타칭 민주주의 국가라는 나라의 성적치고는 너무 초라해 부끄러울 따름이다. 민주주의 모범 국가들은 ‘남녀 동수’를 실천하고 있다.
 
여성의 정치적 과소 대표는 법·제도·사회구조 등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여성을 후보로 공천하지 않는 정당의 중년 남성 정치인들의 기득권 카르텔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여성과 청년을 최우선 공천하겠다느니’, ‘여성 친화 정당을 만들겠다느니’ 하는 근엄한 약속들은 일회용 립 서비스일 뿐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원자화된 개인일 뿐 세력화된 집단으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이번 공천 국면에서 보인 정당 내부의 여성 지도력 부재는 이런 문제를 한층 더 악화시켰다. 다선 여성 국회의원들이 여당에선 국무위원으로, 야당에선 지도력 훼손으로 정치력의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청년은 더더욱 취약한 개인일 뿐이다. 다수의 2030 청년을 비례대표 후보로 영입하고, 청년들만 경선에 참여하는 전략공천 선거구를 마련하겠다는 등 분주한 모습을 보였지만 2030 청년 지역구 후보는 6%에 불과하다. 민주당 2.8%, 통합당 5.2%로 결과는 아주 인색했다.
 
정당은 정치하고자 하는 청년 인재 풀이 좁다고, 준비된 청년 후보가 적다고 주장한다. 정당의 책무는 청년 정치인을 발굴하고 훈련해, 준비된 후보자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 ‘인형 뽑기’가 아니다. 여전히 정당은 책임을 방기하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른다.
 
거대 정당들은 서로를 심판하겠다고 으르렁대고 있다. 그 소리에 귀가 먹어 변화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거대정당들의 비례위성정당 창당으로 헌신짝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정치, 연정의 정치를 위한 디딤돌임은 유효하다. 단지 다른 전략이 필요할 뿐이다.
 
기성정당 정치판에 끼어들기 위한 선거연합은 아니다. 이번 21대 총선에는 여성과 청년을 정치세력으로 규합하고, 여성과 청년 의제를 전면에 내세운 정치적 결사체인 ‘그들만의 정당들’(미래당·여성의당 등)이 출전한다.
 
여성과 청년은 유권자의 선택할 자유를 침해한 비례 위성정당의 초헌법성을 비판하고 독자 세력화를 통해 새판 짜기에 도전해야 한다. 변화의 목소리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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