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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금도 외면 ‘닥치고 달러’…금융시장, 가보지 않은 길로

중앙선데이 2020.03.28 00:21 679호 14면 지면보기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팬데믹(세계 대유행)을 선언한 후 세계 금융시장에선 얼른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절대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국채 금리가 치솟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수록 오르는 금값은 연일 급락했다. 각국 정부가 금리를 내리고 시중에 돈을 풀겠다고 해도 이런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경제 상식, 혹은 경험으로 축적한 통념과는 거리가 먼 기현상 속에 투자자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코로나19가 바꾼 경제 통념
시장 불안한데도 국채·금값 급락
달러만 찾아 안전자산 역할 못 해

전례 없는 양적완화로 진정됐지만
경기침체 뻔한데 더 쓸 카드 없어
“대공황급 충격” “빨리 회복” 엇갈려

일반적으로 경기가 불안해지면 안전성이 높은 미국 국채나 금에 돈이 몰린다. 특히 금은 적어도 지금까진 재난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세계로 급속히 확산하자 금값은 예상을 깨고 곤두박질쳤다. 올 초 온스당 1700달러를 호가하던 국제금값은 3월 들어 급락을 거듭해 16일(이하 현지시간) 1500달러 선이 깨졌다. 18일에는 1477달러로 떨어졌다. 미국 국채도 마찬가지다. 10년 만기 금리는 9일 연 0.54%로 내렸지만 이후 급등하기 시작해 18일에는 1.18%를 찍었다. 금리가 오른다는 건 국채 가격 하락을 의미한다. 독일 국채 금리도 급등세를 보였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 황병진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경기 침체가 가시화하면서 주식이나 원자재뿐 아니라 채권, 금과 같은 안전자산에서도 무차별적인 매도세가 나타났다”며 “달러 유동성 경색 속에 투자자의 현금 수요가 안전자산 가격까지 끌어 내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달러 몸값은 연일 상승했다. 영국·일본 등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지수화한 달러인덱스는 9일 94.87에서 19일 103.6으로 급등세를 보였다. 미국이 주요국과 통화스와프를 확대한 19일 이후에도 달러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 코로나19 공포로 너도나도 현금만 찾은 탓이다.
 
공포심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미 증시에서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의 변동성지수(VIX)는 16일 82.69를 기록했다. 세계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1월 최고치(80.74)를 넘어선 것이다. 보통 40 이상은 ‘공포 구간’으로 불린다. 이런 상황은 각국 정부를 가보지 않은 길로 이끌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23일 ‘무제한 양적완화’(달러를 무한으로 발행)를 발표했다. 연준 107년 역사상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이다. 그만큼 현재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한다는 의미다. 연준은 이와 더불어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았던 회사채 매입 카드도 내놨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도 19일 기준금리를 0.1%로 내리고, 대규모 양적완화를 결정했다.  
 
0.1%의 기준금리는 영국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은 26일 환매조건부채권(RP)을 무제한 매입하는 방식으로 금융회사에 자금을 공급키로 했다. 필요하면 중앙은행이 얼마든지 돈을 빌려준다는 것으로, 시장에 무제한으로 돈을 푸는 효과가 있다. ‘한국형 양적완화’를 시작한 것으로, 외환위기·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았던 파격적인 카드다.
 
각국의 무제한 돈 풀기에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나타났던 기현상은 잦아들고 있다. 달러인덱스는 19일 103.60으로 정점을 찍은 후 26일 99.95로 내렸다. 국제금값은 미국의 무제한 양적완화 발표 직후 6% 가까이 급등해 온스당 1600달러 선을 회복했다. 시장 여건이 좋아진 건 아니지만, 통념대로 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각국의 무제한 돈 풀기가 금융시장이 붕괴하는 걸 막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적어도 시장을 예측하고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남은 카드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경기 침체는 기정사실인데, 이미 각국 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를 거의 다 내놓은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연준·영란은행의 부양책에 대해 “모든 것을 쏟아냈다”며 “사실상 무기고에 쌓아놨던 전통적인 무기를 전부 꺼내 발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대공황급 충격이 재현할 것이라는 극도의 비관론이 나오기도 한다. 비관론으로 유명한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24일 야후파이낸스 인터뷰에서 “경기침체가 심각한 상태로 치달으면서 대공황(Great Depression)보다 더 심각한 대공황(Greater Depression)으로 악화할 수 있다”며 “V자도, U자도, L자도 아닌 I자형으로 수직 낙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벤 버냉키

벤 버냉키

#‘월가의 미친 소’로 불리는 투자전문가이자 미국 경제방송 CNBC의 간판 앵커인 짐 크레이머도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시장은 올 하반기에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가정하고 움직이고 있지만 하반기에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고 밝혔다.  
 
대공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조심스런 낙관론도 나온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현재 상황을 “대공항이 아닌 자연재해”라며 빠른 경기 반등을 예상한다. 그는 25일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다음 분기엔 매우 가파른 경기 침체가 있을 수 있다”며 “하지만 셧다운(폐쇄) 기간 고용·비즈니스 부문에 너무 많은 타격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매우 빠른 반등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임스 블러드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도 “단기적으로 경제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겠지만, 코로나19 발병이 정점을 지나면 강한 반등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업률 낮은데 물가 떨어져…필립스 곡선도 오작동
영국의 경제학자 A W 필립스가 1958년 발표해 유명해진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이라는 두 경제지표가 서로 반비례 관계임을 나타낸다. 경기가 좋아 실업률이 떨어지면 소비가 촉진되면서 물가가 오르지만, 거꾸로 경기가 나빠 실업률이 오르면 소비가 줄면서 물가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런데 필립스 곡선은 수년간 번번이 오작동하면서 경제 정책 입안자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예컨대 지난해 미국은 실업률이 3.7%로 1969년 이후 최저 수준이었지만, 전년 대비 물가상승률도 1.8%에 그쳤다. 같은 기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실업률이 낮은 편이던 한국(3.8%)과 일본(2.4%)도 물가상승률은 한국이 0.4%, 일본이 0.5%로 낮았다. 물가안정목표(2% 상승률) 하회가 두드러지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해 12월 기자간담회에서 “주요국에서처럼 우리 경제가 저물가 구조로 변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낮은 실업률만 보면 기준금리를 끌어올리는 게 맞지만 물가 수준을 보면 통화 공급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다. 각국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딜레마다.
 
필립스 곡선의 오작동 이유는 뭘까. 우선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임금 인상이 과거보다 제약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으로 기업들이 자동화 보폭을 넓히면서 생산비용을 낮추기 쉬워졌다. 올 초 방한한 경기 예측 전문가 앨런 사이나이 디시전이코노믹스(미국 컨설팅 업체) 회장은 강연에서 아마존을 예로 들면서 다른 배경도 짚었다. 아마존은 물류비를 줄여 염가에 많은 물품을 공급하고 소비자는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구매한다. 온라인 가격 비교를 통한 취사선택도 쉬워졌다. 그러면서 전반적 소비가 늘되, 물가는 기업 간 치열한 가격·공급 경쟁 속에 안정되는 현상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에 골드만삭스는 미국의 실업률이 올해 최고 9%로 폭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국가통계국도 지난 달 중국의 전년 동기 대비 물가상승률이 5.2%였다고 지난 10일(현지시간)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지난 달 실업률 3.3%, 물가상승률 1.1%이었다.  
 
비교적 선방했지만 코로나19가 본격 유행한 이달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중앙은행들은 두 지표와 씨름하며 실물경제 충격 최소화 대응책을 내놓아야 하는 시험대에 또 오르게 됐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황정일·이창균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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