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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으려 발전한 인류…발전할수록 더 외로워져

중앙선데이 2020.03.28 00:02 679호 24면 지면보기

미래 Big Questions 〈12〉 외로움

할아버지는 이미 잠들어버린 걸까? 따듯한 옷을 걸치고 구석에 앉아 아들, 딸, 손자, 손녀의 모습을 슬그머니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어른들은 이미 술에 취해 흥이 넘친다. 고대 아라비아 여성들이 속눈썹 화장에 사용하던 ‘콜’ 가루 ‘al-kuhl’이란 단어에서 왔다는 ‘알코올’. 조금 전까지 우울하고 세상이 망할 것 같았는데 알코올 한잔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방에 혼자 숨어 흘리던 눈물은 어느덧 웃음의 눈물이 되고, 힘들고 서러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무기력은 한 잔의 술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내가 세상의 주인이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뭐 그런 터무니없는 순간 말이다.
 

혼자 있으면 떠오르는 과거 아픔
마음의 지하실에 ‘시체’ 몇 구씩

가면 벗은 ‘나’ 뒤엔 또 다른 가면
진화 통해 만들어진 자아일 수도

인간 대부분이 사상 첫 자가격리
사랑·희망·구원 중 무얼 기다릴까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텐의 그림에서도 역시 그렇다. 뭐가 그리 즐겁고 좋은 걸까? 창문 밖 걱정과 근심은 사라지고, 너무도 큰 세상 앞에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작은 우주 안에서만은 존재적 거인이 된다.  
  
‘나’는 삶이라는 포장지 속의 콘텐트?
 
에드워드 호퍼(1882~1967), ‘자동판매기’(1927). [디모인 아트센터]

에드워드 호퍼(1882~1967), ‘자동판매기’(1927). [디모인 아트센터]

그뿐만이 아니다. ‘어른이 노래하면 아이들은 따라서 재잘거린다’라는 그림의 제목에서 같이, 우리에게 가족과 친구는 동시에 학교이자 선생님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 어른을 따라 하던 아이가 어느새 다른 아이들의 모범이 되기에, ‘따라 재잘거리기’야 말로 삶의 진리이자 본질이라고 앵무새는 할아버지 뒤에서 재잘거리는 듯하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안전한 장소에서 세상을 잊을 수만 있다면. 거기에 술 한잔과 노래까지 함께 한다면 더는 부러운 게 없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괴물도, 좀비도 아니다. 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인간의 불행은 고요한 방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조용한 방에서의 나. 외부의 소리가 사라지고, 고요한 방에 혼자 남은 나에게 갑자기 새로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내면의 소리다. 근심과 걱정, 이 험한 세상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지만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그나마 괜찮다. 미래를 언제든지 왜곡할 수 있는 착시 능력을 인간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다르다. 이미 벌어진, 더는 바꿀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은 피하기 어렵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과거의 실수들. 홀로 밤에 이불킥이라도 하고 싶은 부당한 경험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럴싸한 모습과는 달리 사실 찌질하고 비굴한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더욱 수치스러운 나의 모습. 마음의 지하실에 누구나 ‘시체’ 몇 구는 숨겨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콘디치오후마나(conditio humana), 인간으로 서의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동료 4명과 쿠데타를 한답시고 육상자위대 건물에서 할복자살한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 그의 초기 작품 『가면의 고백』에서 말하듯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단순히 외모, 표정, 언어, 행동만의 가면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타인 앞에선 숨겨야 하는 존재적 가면을 써야 하는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홀로 고요한 방에 앉아 내면의 소리를 듣는 순간 존재적 가면은 사라지고, 우리는 꼭꼭 숨겨두었던 진정한 모습, 누구를 위한 내가 아닌, 단순히 내가 나인,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가면을 벗은 나의 모습이 대부분 그다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가면을 벗으면 또 하나의 가면, 그 뒤엔 또 다른 가면 …  끝없는 존재적 가면 뒤에 진정한 나라는 존재는 어쩌면 실제가 아닌 만들어진 허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얀 스텐(1626~1679), ‘어른이 노래하면, 아이들은 따라서 재잘거린다’(1668~1670).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얀 스텐(1626~1679), ‘어른이 노래하면, 아이들은 따라서 재잘거린다’(1668~1670).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나는 누구일까? ‘나’라는 완벽히 독립적인 무언가가 세상에 태어나 한국인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어 지금 이 순간 칼럼을 쓰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대학에서 근무하는 어느 한국인의 기억과 희망과 두려움의 교집합에 ‘나’라는 이름이 붙여진 걸까? ‘나’는 삶이라는 포장지 안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적 콘텐트일까? 아니면 단순히 포장지에 인쇄된 이름일까? 현대 뇌과학에서는 후자에 가능성을 더 두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우리가 믿었던 거보다 훨씬 덜 근본적일 수도 있다는 결과들 덕분이다. 뇌 특정 영역 한 곳만 손상돼도, 아니 알코올 몇 잔만 마셔도 쉽게 흐트러지는 것이 ‘나’라면, 자아는 어쩌면 본질적인 것이 아닌, 진화와 환경을 통해 만들어진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의심해 볼 수 있겠다.
 
그중 철학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결과는 코타르 증후군(Cotard’s syndrome)이다. 1880년 프랑스 의사 줄 코타르(Jules Cotard)를 통해 처음 보고된 이 뇌 질환을 가진 환자들은 본인이 살아있지 않는다고 믿는다. 물론 환자들은 분명히 살아있다. 생각하고 말도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 볼 수 있다. “당신, 생각하죠?” 그러면, “생각합니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존재한다는 거죠?”라고 물으면, 끝까지 아니라고 대답한다. 철학자 데카르트에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절대적이었지만, 코타르 증후군 환자들은 주장한다.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행동과 생각은 하지만, ‘존재한다’라는 느낌이 없다는 코타르 증후군 환자들. 그렇다면 반대로 ‘나’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단순히 ‘존재한다’는 느낌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자아와 의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가 존재하고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그냥 그 느낌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질문할 수 있겠다. 내가 나라는 느낌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이라는 느낌일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은 시간적 차원을 넘어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있는 이들을 통해 성립된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다.  
  
외로움, 불행의 시작이자 예술의 시작
 
블레즈 파스칼(1623~1662).

블레즈 파스칼(1623~1662).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에, 나라는 느낌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속해 있는 사회적 그룹을 통해 완성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얀 스텐의 그림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아무도 없기에 고요한, 나 자신의 생각만 남아있는 혼자만의 방에선 불행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야기, 음악, 종교, 정치, 스포츠 … 어쩌면 인류 문명의 대부분은 내면의 어두운 고요함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쉴 틈 없이 본인에게 재잘거려주는 외면적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모두가 나와 함께 있다고.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팬데믹 덕분에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 대부분이 자가격리에 들어간 오늘날. 사랑하고 걱정하기에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지금. 우리는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같이 홀로 남아 혼자 차를 마시며 나 스스로만의 생각에 빠져버린다. 그림의 그녀처럼 질문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사랑일까? 희망일까? 아니면 구원일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기다림 그 자체를 통해 존재의 외로움을 잊으려 하는 걸까? 인간에게 외로움은 언제나 불행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모든 문명과 과학과 예술의 시작이기도 했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고 발전하는 인류. 하지만 과학과 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 외로워져야 하는 역설적 존재가 바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인지도 모르겠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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