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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문재인 정부는 운이 좋다

중앙일보 2020.03.27 00:56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그해에도 선거가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덮친 1997년. 한때 90%를 넘나들었던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은 젖은 낙엽처럼 추락했다. 연말 대선에서 야당이 이겼다. 헌정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정권이 바뀌었다. 23년 후, 다시 선거를 앞두고 경제 위기가 왔다. 이번엔 대선이 아닌 총선이다. 재난 앞에서 정치적 셈법을 따지는 것은 뭣하지만 코로나19는 여권에 재앙이 되리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추이는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론조사와 체감 정서는 여당에 불리하지 않다. 주춤하던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도는 다시 상승하고 있다. 대규모 재난과 경제 난국이 집권당에 불리하리라던 통념이 깨지는 걸까. 반전의 이유는 뭘까.
 

과거에 빚지지 않은 현재는 없다
국민과 기업이 위기 극복의 주역
운을 실력으로 착각하지 마라

‘지금은 전시’라고들 한다. 전쟁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병력과 보급품이다. 지금 정부는 97년 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가용 자원이 있다. 이 점에서 현 정부는 운이 좋다. 정부의 대응 노력과 능력을 깎아내리자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운을 실력이라고 착각했다간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점은 알아야 한다.
 
우선 위기 발생의 지정학적 특성이다. 97년 외환위기는 아시아에 국한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기본적 관심은 돈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달러 대출 조건으로 고금리 등 혹독한 긴축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죽어가는 중환자에게 산소호흡기를 끼우기는커녕 다이어트를 강요한 격이다. 전 세계가 손을 잡고 무조건 돈을 풀고 보자는 해법에 눈을 돌린 것은 10년 뒤 금융위기 때였다. 자신들의 사정이 다급해졌기 때문이다.
 
97년 YS 정부는 달러 구걸 외에는 쓸 수 있는 카드가 없었다. 당시 국가 재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97년 국가 채무 비율은 불과 11.4%였다. 지금의 40%선보다 한참 낮다. 하지만 달러 곳간이 위태로운 판에 재정 투입이 방법이 될 수는 없었다. 상대적으로 튼튼했던 재정은 급한 불을 끄고서야 차기 DJ 정부에서 부실 금융 정리를 위한 공적 자금 투입에 요긴하게 쓰였다.
 
이에 반해 지금 정부는 여유가 있다. 완전히 안심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4000억 달러가 넘는 보유 외환이 방파제처럼 버티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비상 대책 프로그램의 하나로 작동된 한·미 통화 스와프도 힘이 됐다. 무엇보다 재정 정책의 프레임이 달라졌다. 기업과 금융시장의 유동성 지원을 위해 100조원을 책정했지만 부족하면 더 풀어야 한다는 인식이 작동하고 있다. 재난 지원 명목의 현금 살포도 마다치 않을 기색이다.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아니라는 절박감 때문이다. 선거를 앞둔 여권에는 꽃놀이패나 다름없다.
 
정부는 몰라보게 좋아진 기업 체질 덕도 보고 있다. 외환위기 때처럼 30대 그룹의 부채 비율이 500%를 웃도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재정을 퍼붓는들 감당할 수 없다. 지난해 자산 5조원 이상 기업 집단의 부채 비율은 70% 아래로 떨어졌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 수많은 실직자와 자영업자, 경제적 약자들의 아픔이 직조물처럼 얽혀 있다.
 
과거에 빚지지 않은 현재는 없다. 세계가 칭송하는 방역 체계의 기초는 박정희 정권이 도입한 의료보험 제도다. 세계가 감탄하는 진단 키트 개발과 생산은 2015년 메르스 사태가 계기가 됐다. 과거의 승계보다는 청산에 집착하던 정권이 과거 유산의 덕을 보는 건 아이러니다. 이 운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른다. 심연을 알 수 없는 위기는 이제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코로나19 이후, 미래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미래와는 다를 것이다. 낯선 미래에 말을 거는 방법은 겸손이어야 한다. 96년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무난히 승리했다. 불과 1년 7개월 뒤 한국은 IMF 구제금융에 들어갔고, 다음 달 정권을 넘겨줬다. 4월 총선 뒤 다음 대선까지는 2년 1개월 남았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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