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간중앙] 라종일 교수가 말하는 ‘DJ 정부 남북관계’ 비화

중앙일보 2020.03.27 00:03
■ 첫째, 남한과 이야기할 때는 민족을 내세운다
■ 둘째, 햇볕정책 이용해 현금·식량·비료 등 물질적 자원을 확보한다

창간 특별기획 | ‘6·15’ 20년과 ‘6·25’ 70년
남한의 ‘햇볕정책’ 맞설 북한의 4大 ‘햇볕 대책’ 존재했다

■ 셋째, 햇볕정책 활용해 반미, 친북 세력을 양성한다
■ 넷째, 마음속으로 친하지는 않는다. 군사력 키우고 결정적 계기를 기다린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남한의 군사적 안전보장을 전제로 하는 대북(對北) 포용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남한의 군사적 안전보장을 전제로 하는 대북(對北) 포용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외교안보 전문가로서 국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90년대 초 정계 은퇴 상태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가 있을 때부터 햇볕정책 등에 관해 조언을 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 들어, 안기부 1·2 차장 및 영국 대사를 지냈고, 이어 노무현 정부 땐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현재 안보실장) 및 일본 대사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6·25 전쟁을 다룬 [세계와 한국전쟁]을 출간한 것을 비롯해 [장성택의 길]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등 남북관계와 외교안보 관련 책을 계속 펴내고 있다. 1940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81세를 맞는 원로다.
 
그는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한다. 하지만 남북한 권력 사이의 요란한 이벤트를 경계하는 편이다. ‘통일’이라는 말도 자제하자고 한다. 남북한 국민들의 마음속 깊이 쌓여 있는 상처를 달래주는 실질적인 화해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올해는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과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사에서 전쟁과 화해의 두 변곡점이 꺾어지는 해를 맞은 셈이다. 월간중앙은 평소 한국전쟁에 천착하고, 진보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수립에도 깊이 관여한 라종일 석좌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희대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햇볕정책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군사적 안전 보장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했다. 우리가 무장을 해제한다고 해서 평화가 주어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남북관계의 속살이랄까,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언급도 있었다. 남한의 햇볕정책에 대해 북한이 일찍부터 준비한 대응책에 관한 내용이다.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보인다. 북한 입장에선 햇볕정책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련한 북한의 ‘햇볕 대책’이자 ‘반(反)햇볕정책’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대개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남한과 이야기할 때 ‘민족’을 내세우자. 사회주의, 공산주의 얘기는 안 한다. 우리 민족끼리, 미국 빼고 하자는 건 좋은 명분이다.
 
둘째, 햇볕정책을 이용해서 물질적으로 부족한 걸 최대한 해결한다. 제일 중요한 게 현금이고 그 외 식량, 비료 등 다른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다.
 
셋째, 햇볕정책을 이용해서 반미, 친북 세력을 양성한다.
 
넷째, 가까이는 지내도 마음속으로 군사력을 키우고 친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린다.
 
인터뷰는 3월 5일 오후 2시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자리한 가천대 본관 라종일 교수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먼저 6·15 남북공동선언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햇볕정책에 대해 지난 20년간 점수를 매겨본다면 100점 만점에 몇 점을 줄 수 있을까?
 
“교수를 오래 했는데 제일 싫은 게 채점하는 거다. 나는 학생들보고 스스로 문제를 내고 답안을 준비하고 평가도 하도록 한다. 정치나 사회 현상에 관해서는 정답이 없다. 사람마다 답이 다르다. 학생들에게 정답을 제시하고 이를 가르치기 보다 뭐가 문제인지를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 나는 학생들의 평가에 세 가지를 본다. 좋은 문제 제기, 창의적인 문제를 찾아냈는지가 그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찾은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논리정연하게 서술했는지도 살핀다. 나아가 자기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얼마나 잘 평가했는지 등을 기준으로 채점을 한다. 내가 전공으로 가르치는 과목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데 큰 역사적인 문제를 점수를 매기라니, 그건 좀 답을 유예하자.”
 
라 교수 스스로 문제를 낸다면 어떻게 낼 것인가?
 
“대신 이렇게 한번 보자. 햇볕정책은 좋은 제목이다. 어휘를 잘 골랐다. 그 근거가 된 [이솝우화]도 괜찮다. 싫은 사람, 나쁜 사람 혹은 적이 있으면 오히려 더 단단해진다는 얘기지 않나. 좋은 얘기다. 그런데 내가 초기 단계부터 의아심을 가졌던 건, 햇볕정책이란 것이 전략전술적인 개념인가 하는 거다. 상대방의 외투를 벗기는 데는 성공하겠지만 외투를 벗김을 당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햇볕정책에 대해 역시 전략전술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여러 차례 강연에서도 얘기했는데, [이솝우화]보다는 [성경]의 ‘마태복음’(5장 45절)에 나오는 햇볕을 생각하면 어떻겠나. 마태복음 속 하나님의 햇볕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남자, 여자 안 가리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혜택을 준다. 그런 개념이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께 말씀을 드린 일이 있다. 좋다고는 하셨는데, 실제 햇볕정책이 그런 식으로 되었는지 모르겠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내용은 어떻게 평가하나?
 
“물론 좋은 발전이다. 한국전쟁 때 서로 죽이고 그랬는데 이런 사실에 관한 깊은 후회와 반성이 없이 이제 그렇게 하지 말자.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통일로 가자는 것인데, 제일 첫째 항목에 ‘통일’이 나온다. 난 그것도 좀 불안했다.”
 
 

과거 정리 없는 화해, 협력 가능한가

2000년 6월 1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포옹하고 있다.(왼쪽)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마지막 날인 2018년 8월 26일 이산가족이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오른쪽) / 사진:연합뉴스 / 중앙포토

2000년 6월 1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포옹하고 있다.(왼쪽)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마지막 날인 2018년 8월 26일 이산가족이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오른쪽) / 사진:연합뉴스 / 중앙포토

어떤 점이 불안했나?
 
“한국전쟁 때 원수지간이었다. 혹시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임철우 작가의 소설 [붉은 방]을 읽었는가. 사람을 엄청나게 고문하고 못살게 구는 인물이 나온다. 처음에는 가해자인데 소설을 읽다 보면 피해자다. 일가가 한국전쟁 때 공산당 손에 다 죽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이놈들한테 복수를 해야 한다, 우리 집을 이렇게 망치고 너를 대학도 못 가게 하고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다 죽였으니 이놈들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 아버지는 트라우마를 못 이겨 결국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읽다 보면 이 사람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모르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지만 한국전쟁에 관련된 원한 문제가 다 해결이 됐는가. 과거를 정리하는 기반 없이 말로만 상호 화해·협력하고 교류하자 하면 되는 일인가.”
 
6·25 전쟁이 남긴 상처의 깊이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인가?
 
“햇볕정책에 통일이 들어간다면 나는 상당히 문제라고 생각했다. 두 권력 체제가 협력해서 하나를 만들어야 하는 과정이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부터 시작하더라도 그렇다. 그럴 때 혜택을 주는 사람의 입장과 받아야 하는 사람의 입장은 어떻게 되나, 그런 게 걱정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본인이 공개적으로 이런 얘길 했다. 공산주의 사회는 고립을 시키고 교류·협력을 안 하면 단단해지지만 교류를 하면 망한다고.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말을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나. 그렇지 않아도 경제는 엉망이고, 국제사회에서 고립이 돼 있고, 대규모 기근이 나고, 보건·행정뿐 아니라 모든 게 엉망인 상황에서, 교류하고 서로 터놓고 왕래하고 협력하면서 통일하자고 하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나.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겠나, 그런 점이 걱정이었다.”
 
지금 말씀처럼 북한의 시각은 우리와 다를 것 같다. ‘햇볕을 비춰줄 테니 웃옷을 벗으라’는 얘기가 북한으로선 달갑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북한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 그렇지만 다른 차원이 있었을 것이다. 김정일 본인이 측근들에게 ‘햇볕은 대포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 않나. ‘이 햇볕을 잘 활용하면 우리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송호경, 리종혁 등 당시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던 이들은 1997년 말에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햇볕정책을 시작하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북한은 겉으로는 햇볕정책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핵무기를 개발했다. 남한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 즉 핵무기를 가진 북한에게 햇볕정책을 계속 쓴다는 게 논리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일까?
 
“나의 개인 입장은, 핵무기에도 불구하고 교류·협력은 계속해야 한다는 거다. 핵무기 때문에 교류를 끊겠다는 건 옳지 않다. 단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3원칙에 있는 것처럼 무력도발을 용인하지 않는다, 무력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경우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하고 협력함으로써, 한 단계 더 나아가 이 협력을 통해 경제나 정치적 경험 등 우리가 한 단계 더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상황은 반드시 낙관적인 전망만 할 수가 없다. 안보 문제에 관해서는 든든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상대의 선의만 믿고 우리가 잘해주니까 저쪽도 우리에게 잘해주리라 생각하면 안 된다.”
 
남한이 북한을 도와줬는데 오히려 북한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경험이 있나?  
 
“1998년에 내가 정부에서 일할 때 책임 중 하나가 북한이었다. ‘소 떼 방북’ 기억하는지. 우린 참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앞장서서 보내니까. 솔직히 국정원도 잘 갈 수 있도록 온갖 협력을 다 해줬다. 그런데 무슨 얘기가 돌아왔냐 하면, 북한이 국정원을 표적으로 잡아서 맹렬히 비난했다. ‘국정원이 남북 교류를 막으려고 소한테 나쁜 걸 먹였다’고. ‘소가 몇 마리 죽었는데 배를 갈랐더니 비닐하고 지푸라기 같은 게 있더라’는 거다. 우리가 조사까지 해봤는데 정말 그런 일은 없었다. 그리고 국정원이 막으려면 그런 식으로 하겠나. 겨우 소한테 비닐이나 먹여서 그러진 않을 것 아닌가. 그 사람들은 우리의 호의를 좋게 받을 수만은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도와주려고 했지만 한국 정부는 나쁜 짓을 했다고 비난했다. 주는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받는 사람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해주지 않으면 아니 된다. 특히 양자가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다면 특히 그렇다.”
 
 

“북한은 우리의 호의를 좋게 받을 수만은 없었다”

지난해 6월 10일, 라종일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6·10만세운동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지난해 6월 10일, 라종일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6·10만세운동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그런 일까지 있었나?
 
“또 하나 있다. 제주에서 밀감 풍년이 들어서 밀감을 많이 보낸 일이 있는데 그때도 비난이 돌아왔다. ‘밀감이 왔는데 보니까 다 얼어 터졌더라’고 했다. 대량 수송하면서 혹시 파손된 게 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런 트집이라도 잡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는 얘기다. 주는 사람이 주면서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 더구나 양쪽의 권력이 개입되는 거다. 그냥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라, 북한 정권으로서는 햇볕정책을 잘못 다뤘다가는 권력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송호경, 리종혁 같은 당시 북한의 대남정책 책임자 차원에서는 남한의 햇볕정책에 대한 북한 나름의 대응책을 세웠고, 그것은 그들 나름의 ‘반(反)햇볕정책’이라고 봐도 될까?
 
“그렇게 안 했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북한의 대(對)햇볕전략의 요지가 이런 거였다. 첫째는 남한과 이야기할 때 민족이라는 걸 앞에 내세우자. 사회주의라는 말을 쓰면 남한 쪽에서 반발이 있을 테니까, 또 남한의 민중이 오랫동안 반공에 길들여 있었으니까. 사회주의, 공산주의 얘기는 안 한다. 우리 민족끼리 미국 빼고 하자는 건 좋은 명분이다. 둘째로 햇볕정책을 이용해서 물질적으로 부족한 걸 최대한 해결하려 했다. 제일 중요한 게 현금이었고 그 외 식량, 비료 등 다른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다. 셋째는 햇볕정책을 활용해서 반미(反美), 친북(親北) 세력을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가깝게 지내도 마음속으로 친하지는 않으며, 군사력을 키우고 결정적인 계기를 기다린다는 거다.”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세운 것은 언제로 봐야 할까?
 
“오래됐다. 사실 한국전쟁 끝난 직후에 이미 관심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실패한 건 미국의 개입을 못 막아서인데 핵만 있으면 막을 수 있다고. 그런데 북한만이 아니라 우리도 핵개발을 하려고 생각을 했었다. 민간이나 정부 차원 모두에서.”
 
북한이 1990년대 핵개발을 서두른 이유는?
 
“남북한 경제 능력의 비율을 보면 북한이 자기들의 경제적 능력을 거의 전부 군비에 쏟아붓더라도 남한하고 경쟁이 안 된다. 그러니까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들고 효과적인 무기를 개발하려고 한 거다.”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것은 언제부터로 봐야 하나?
 
“진보 정권 집권 10년 사이에 핵개발에 성공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에 성공했는가?
 
“그렇다. 2005년, 2006년 그때다.”
 
노무현 정부 초기 대북송금 특검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햇볕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당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음을 몰랐나?
 
“알았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리자오싱, “북한 핵실험은 미친 짓”

2016년 3월 9일 북한 [노동신문]은 핵탄두로 추정되는 물체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살펴보는 사진을 공개했다. / 사진:연합뉴스

2016년 3월 9일 북한 [노동신문]은 핵탄두로 추정되는 물체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살펴보는 사진을 공개했다. / 사진:연합뉴스

그렇다면 핵개발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어야 하지 않나?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북한의 핵개발에 관해서는 우리보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더 컸다. 핵이 그렇게 확산된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으니까. 미국의 9·11 사태 때 제일 큰 관심 중 하나가, 혹시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나빠질 때, 즉 테러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핵전쟁이 나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북한처럼 굉장히 가난하고 국제적으로 개방이 되지 않고 교류도 적은 나라가 핵을 개발한다면 큰 위협으로 봤다. 국제적 관심이 우리보다 훨씬 크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시 일화가 있다면?
 
“북한이 핵을 개발하던 2005~2006년 무렵 일본 대사로 가 있었는데 그때 친한 사람 중 하나가 리자오싱이라는 중국 외교부장이었다. 핵실험 약 일주일 전에 리자오싱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얘기했다. 북한이 핵무기 실험하려고 한다고 좀 말리라고 내가 말했다. 리자오싱은 시를 쓰고 나는 동화를 써서 둘이 바꾸고 그랬다. 그런데 리자오싱이 날 보고 쓸데없는 얘기 한다고, 동화 쓰는 사람이라 그런다고 그랬다. 북한이 어떻게 핵실험을 하냐고. 실험 일주일 전이었다. 내가 진짜로 한다 했더니, 어디다 하냐고, 소련은 시베리아가 있고, 미국은 태평양에서도 하고, 프랑스는 사하라사막에서 하는데, 북한은 손바닥만 한 땅에서 반쪽 차지하고 있는데 거기서 자손만대 살려면, 핵무기 실험을 하면 미친 짓 아니냐고 했다. 미친 짓인데 한다고 그랬더니, 어디서 하냐고, 그래서 지하에서 한다고 그랬더니, 깔깔거리고 웃더니 지하에서 하면 그게 온전하겠냐고, 자손만대 수천 년 살아야 하는데 아무리 철저히 한다고 해도 지하수도 있고 틈이 생기고 하면 어디든지 다 퍼질 텐데 미친 짓 아니냐고. 미친 짓인데 그래도 한다, 좀 말려라 그랬더니 에이 안 한다고 걱정 말라고 그러더라. 근데도 했다. 그 작은 땅에서 지하에서 핵실험을 했다. 권력이라는 게 그렇다.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권력을 쥔 사람들은 뭐든지 한다.”
 
미·중 패권전쟁으로 신냉전 시대가 동북아에서 시작되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냉전 시대의 대결 구도와 탈냉전의 햇볕정책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양립하기 어렵다면 한국은 햇볕정책 말고 어떤 대북 정책을 취해야 할까?
 
“우선 전제에 이의가 있다. 신냉전이라고 부를 수 있나. 냉전의 기본적인 구도는 지정학적 갈등과 이념적인 대립이 결부된 거였다. 완전히 두 개의 세계. 세계가 서로 다르다. 또 단순히 국가와 국가 간 대결만이 아니었다.”
 
냉전 시대와 신냉전의 차이를 지적하는 건가?
 
“그렇다. 신냉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다른 얘기지만, 그건 유보하고. 지금은 두 개의 세계라고 할 수 없고, 이념적인 대결은 없다. 두 개의 보편적인 이념이 대립하는 건 아니다. 서로 엄청나게 연결이 돼 있다. 한쪽이 손해를 보면 다른 쪽이 이득 보는 구도가 아니다. 신냉전으로 부르는 걸 나는 유보적으로 대한다. 패권경쟁이라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미국하고 패권을 경쟁할 만한 그런 건 아니지 않나. 미국의 영향력을 잠식하려고 한다면 몰라도. 미국이 만일 완전히 고립주의에 빠진다면 중국이 미국이 하는 역할을 다 대신할 수 있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만 봐도 그렇다.”
 
신냉전 혹은 미·중 패권전쟁 시대에 우리의 대북 정책은 어때야 할까?
 
“신냉전이건 신냉전이 아니건 간에 햇볕정책은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핵을 갖건 안 갖건 간에, 우리 보고 욕설을 퍼붓건 말건 지속적으로 북한하고 좋은 관계를 갖도록 유지해야 한다. 진보정권에서 추진한 햇볕정책에 관해서 전적으로 잘했다고 얘기는 못하지만 근본적으로 옳은 일이다. 단, 좀 더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전쟁 때 서로 죽이고 살리고 했다는 거다. 한국전쟁 때문에 분단이 훨씬 더 고착이 됐다. 허술했던 38선이 엄청난 무장이 집결된 비무장 지대로 바뀌었다. 그보다 더 심한 건 사람들 마음속의 분단이다. 서로 대량으로 죽이고 살리고, 빨갱이다 반동분자다 했다. 다시 말하지만 임철우 소설을 보면 그럴 수가 있겠구나 싶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쌓여 있던 것 때문에 ‘이놈도 빨갱이’라고 생각한 거다. 체제에 도전하는 나쁜 놈이라고. 북한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런데 이걸 무시하고 남북한 정상이 만나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자’ 그렇게 할 수 있나. 훨씬 더 마음을 썼어야 한다.”
 
 

“한국전쟁 후 책임지는 남북 지도자 없어”

지난해 3월 경기 연천군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육군 25사단 수색대원들이 통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해 3월 경기 연천군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육군 25사단 수색대원들이 통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남북한 사람들 사이에 패인 깊은 상처의 골을 감싸지 않고 섣부르게 통일을 언급해선 안 된다는 뜻인가?
 
“제발 정치 지도자들이 겸손한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통일을 하고, 거기다 핵무기까지 갖고, 강대국 행세를 하려고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철도를 놓고 유럽까지 연결을 한다? 그런 것도 천천히 좀 뒤로 미루고, 통일 얘기 함부로 하지 말자.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과 필요를 생각하자. 예를 들어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의 치료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통일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자. 쉬운 일이 아니다.”
 
통일이 왜 어렵다고 보는지?
 
“예를 들어 동독의 경우 상비군이 6만 정도였다. 서독은 나토(NATO)라는 게 있었고. 동독의 군사적 대비는 소련군이었는데 30만 명이었나 그랬다. 그런데도 군대를 통합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은 상비군만 100만 명이 넘는다. 통일 쉽게 생각하지 말고 통일을 매니지(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살펴봐야 한다. 만일 통일할 수 있는 축적된 능력이 양쪽에 있다면 애당초 분단도 전쟁도 안 치르지 않았겠나.
 
그리고 전쟁을 치르고 난 다음에 후회하고 반성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서로 잘났다고 하고 책임지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다. 정치라는 게 책임윤리다. 성직자 같은 분들은 좋은 뜻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 뜻이 중요하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는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했더라도 나쁜 결과를 만들어냈으면 책임져야 한다. 잘못했다고 하고 사표라도 내야 한다. 그런데 안 그런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주로 남 탓을 한다. 누가 나빠서 그랬다고. 뭐가 안 되면 이게 내 능력의 한계다 하고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
 
한반도의 전쟁을 막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안보는 철저히 지켜야 한다. 정부는 국민의 안보를 지켜줄 책임이 있다. 동맹에 의존하든지 자체 안보 능력을 키우든지, 어떡하든지 전쟁은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북한이 만일 무력도발을 한다면 너네가 굉장히 손해를 볼 거라고. 그런 조치만 충분히 취하면 크게 걱정할 건 없다. 북한 지도층은 혁명 세력이 아니다. 프랑스 포도주를 마셔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니까. 엄청나게 비싼 말도 수입하고. 백마를 수입하지 않았나. 프랑스 코냑, 포도주, 롤렉스 시계 그런 것만 해도 수천만 달러씩 수입해야 하는 나라니까. 자기네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이어서 자기들이 손해난다 생각하면 안 한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햇볕정책을 유지한다고 해서 안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물론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3원칙 중에 처음이 무력도발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 그 사이에도 북한은 끊임없이 무력도발을 했다. 간첩선 보내고 천안함 사건, 연평해전 등등. 남한은 적어도 무력도발 세력은 아니다. 전쟁 나면 제일 손해 보는 게 우리다. 그 사이 이뤄놓은 성과가 모두 파괴된다. 남한은 아무리 봐도 전쟁하는 나라는 아니다. 서울에 방공호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방공호 건설을 제안한 적이 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서울에 핵공격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공호를 만들자고. 핵공격에 사람이다 죽는 건 아니다. 큰 피해는 나중에 낙진 그런 거 때문에 더 생긴다. 식수, 환기, 식량, 위생처리 등이 갖춰져 있는 시설이 방공호다. 전쟁 가능성이 전혀 없는 스위스 등 유럽 나라들은 방공호를 전부 갖추고 있다. 근데 우리는 그런 거 하나도 안 하고 있다. 그런 건 갖추고 있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쓸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만일의 경우,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의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핵전쟁을 하게 되면 국민들이 피해를 엄청나게 볼 것이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피해를 덜 볼 수 있는 생각은 해야 한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붕괴할 수도 있을까?
 
“붕괴한다면 우리에게도 큰 재난이다. 붕괴에 따르는 인도적인 위기, 군사적인 위기를 관리할 능력이 있는가? 그 위에 우리는 운 좋게(!) 주변에 세계에서 제일 힘센 나라만 4개가 있다. 세계 어디도 안 그렇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들이 파워에 공백이 생겼을 때 이걸 가만히 놔두고 남한이 알아서 처리하라 하겠는가. 중국은, 러시아는, 미국은, 일본은 가만있겠나. 그런 위기들을 다 매니지할 능력이 있나. 붕괴 안 하고 김정은 정권이라도 유지되는 게 낫지. 어떡하든지 옛날 같은 못난 짓 안 하도록, 1950년 같은 바보짓 안 하도록, 서로 죽이고 파괴하고 원수가 돼서 이를 갈고 그러지 않고 조금씩 사정을 낫게 하면서 통일이 되건 평화공존을 하건 할 수 있는 기회를 보는 게 낫다. 정치적 능력, 자기 능력은 전혀 생각 안 하고 햇볕정책을 통해서 금세 통일을 하겠다든지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게 맞지 않나 한다.”
 
 

“북한 지도층은 혁명 세력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
 
“결론을 말하자면 햇볕정책은 지속해야 하고, 대신 군사적 안전 보장은 기초다. 그거는 무시하고 무장 해제한다고 해서 평화를 추구할 수 없다. 그리고 남북한을 통해 민족의 삶의 질과 도덕적인 수준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통일이 돼야 한다. 말하자면 통일은 정치적인 어젠다가 아니라 인간적인 어젠다가 되어야 한다.”
 
미·중 패권전쟁이 더 심각해지면 한국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그때 우리 상황을 봐야 한다. 안보 상황이 엄중하다든지 그런 경우에는 역시 미국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하고의 동맹이 아니었으면 우린 또 전쟁했을 거다. 휴전 후에도 양쪽 다 전쟁에 대한 반성이 없었고 복수할 생각만 있었다. 그러니까 또 전쟁을 했을 거고 안 했더라도 전쟁 상황이 계속됐을 거다.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협 속에. 그랬다면 경제 발전이나 민주화도 없었다. 미군이 여기 있었다는 건 우리한테는 큰 축복이다. 미국은 여기서 북한에 대한 저지(deterrence) 역할뿐 아니라 남한 군대에 대한 억제(restraint) 역할도 했다. 1·21 사태(1968년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 같은 때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서 보복을 못하게 했다. 북한의 엄청난 도발이었다. 남한의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으니까. 이런 일은 계속 되었다.”
 
 
- 대담·정리=배영대 중앙콘텐트랩 근현대사연구소장, 최은혜 기자 balance@joongang.co.kr,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